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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26 00:00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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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어머니'란 제목 앞에 차마 '심심풀이 땅콩'이란 말을 붙일 수 없어, 이번에 한해 이를 생략함. 

 

- 지난번 '땅콩'에 등장했던 '필립핀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던 동창'은 이 관수 동문임을 밝히고

그 때, 그 어려운 때, 발 벗고 도와준 일에 다시 한번 깊히 감사함. 11월 초 나가는 길에 만나서

쇠주 한잔 하고 돌아올 예정임.

 

 

어머니

 
  
   1903년 풍양 조씨(豊壤 趙氏) 문중에 태어나서 열 여섯 되던 해 청주 한씨(淸州 韓氏) 가문으로 출가하여 아흔 셋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마흔 둘에 나를 나으셨고, 쉰 넷에 아버지와 사별하셨다. 한씨 문중에서 사셨던 일흔 여덟 해 가운데 사십 년이란 긴 세월을 아버지 없이 혼자 사셨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전라도를 옮겨 다니며 사시는 동안, 태어나자 금새 죽어버린 첫째 딸에 이어 내리 딸 둘을 더 낳고 뒤늦게 나를 잉태하셨다. 처음 나를 갖고서는 또 딸이라고 생각하고 지워버릴 생각을 여러 차례 했고 실제로 그런 시도도 했다 한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일부러 높은 데서 뛰어 내리거나 무방비로 바닥에 구르는 등 나를 없애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마터면 나는 세상구경을 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차 대전의 막바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일제 치하에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6.25 전란 내내 나를 들쳐 업고 피난살이를 견디셨고, 이렇다 할 재산도 남겨놓지 않은 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신 뒤, 자식들을 남 부끄럽지 않게 기르고 키우고 가르치려고 억척으로 한 평생을 사셨다. 어머니의 성격은 불같이 급하고 깔끔하고 곧아서 그 분 성품에 맞는 자식으로 자라기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늦둥이 외동 아들로 태어난 사실을 생각할 때 좀 녹녹하게 봐주는 구석이 있었을 법한데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전혀 기억에 없다. 두 누나와 똑같이 대우하셨고, 먹을 것 한가지도 따로 챙기셨던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귀한 자식일수록 함부로 길러야 하는 법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마음 속으로야 똑 같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다섯 손가락 가운데 어느 한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더냐는 말씀도 하신 것을 보면 실제 나는 누나들과 차별 대우 받은 일이 결코 없었던 듯 싶기도 하다.
 
   나중에 다 커서 생각할 때 어렸을 적 어머니의 이런 가정교육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생각일 뿐 딸과 아들이 엄격히 구분되어 대우 받던 당시 상황에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얼굴조차 뵌 적이 없는 내게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특히 우리집 사정을 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자라겠거니 오해를 받을 때면 나는 정말 억울하기까지 했다. 희미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나를 두고 어머니와 다투시던 모습이 있다. 밥상 머리에서도 어머니는 내 해찰스런 행동을 용서하는 법이 없었고 이것이 유일한 아버지와 다툼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밥 먹는 애를 나무라서 밥도 못 먹게 한다는 아버지의 역성과 아이를 그렇게 기르면 안 된다는 어머니 생각이 맞서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덕택에 학교에 다닐 때나 그 뒤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도 외아들 같다는 평을 한번도 듣지않고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욕심도 대단하셨다. 무엇이든 남에게 지는 꼴을 보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남들은 쉽게 가는 서울 유학을 당신 자식들이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비록 졸업까지 뒷바라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큰 누나를 서울에 있는 E 대학에 보내셨고, 나는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셨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분 뿐인 서울 삼촌댁에 올라왔다. 당시 고급 공무원이던 삼촌은 재취로 들어오신 숙모님 소유 인사동 큰 한옥에 살고 계셨다. 인사를 나눈 끝에 어머니는 삼촌께 말문을 여셨다. 당신 아들을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보내야겠는데 학비야 집에서 대겠지만, 삼촌을 두고 다른 곳에 기거하게 해서는 안될 일이라 부탁 드리러 왔다고. 그러나 삼촌의 말씀은 확고하였다. 형님도 돌아가셨는데 무슨 재주로 애를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느냐, 아무 생각말고 사범대학을 마쳐 선생을 시켜라, 이런 반응이셨다. 그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는 그 날로 나를 끌고 다시 집으로 내려오셨다.
 
   3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이런 꿈은 내가 중학교를 마치던 해 실현되었다. 아마 그때쯤엔 혼자 떼어놓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 동안 삼촌께는 연락도 하지않고 재종형 댁에 부탁하여 거기 있게 하였다. 삼촌께 다시 말씀을 건네는 일은 어머니의 자존심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 대학 4년 이렇게 집 떠나 혼자 생활한 8년 동안 삼촌께 단 한가지 부탁도 드리지 않고 어머니는 나를 뒷바라지 하셨다. 물론 대학 들어가서는 이른바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가르쳐 용돈을 벌어 쓰기도 하고 하숙비에 보태기도 했지만, 하숙비나 학비가 늦어 걱정해본 일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셨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서울에 올라와 혼자 지낸 8년 동안 한번도 내가 어떻게 사는지 와 보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척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 뿐인 아들의 생활이 궁금하기도 하셨을 테지만, 거짓말 같이 한번도 서울 나들이를 하지 않으셨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런 분이셨다.
 
   어머니의 삼촌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삼촌이 연로하여 자주 우리집에 드나드시게 되면서 어느 정도 풀어지기는 하였겠지만 아마 아주 잊지는 않으셨을 듯싶다. 계기가 있을 때마다 빼놓지않고 그 때 심정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 내가 집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던 동안 삼촌은, 명절 때마다 인사 드리러 찾아 뵙는 내게 얼마되지 않는 돈이지만 차비에 보태 쓰라고 손에 쥐어주시기도 했고,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초대도 하지않았는데 식장에 오셔서 상을 받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으며 그런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삼촌에게서 돈 받았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 드리지 못했다. 아마 그랬더라면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무척 마음 상해하셨을 것이다. 삼촌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학교 다닐 때 모른척한 보상으로 내 결혼에는 꽤 신경을 쓰셨다. 몇 차례나 좋은 규수감이 있으니 선을 보라고 종용하셨고 번번히 시큰둥한 내 반응을 보시고는 심지어 역정을 내기도 하셨다.
 
   집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어머니는 내게 손님같이 불편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오사바사한 아들의 모습을 기대하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혹 꼭 아셔야 할 일이라도 있어 조금 자세하게 말씀 드릴라치면 무슨 남자가 그리 말이 많으냐는 눈치를 보이신 것 또한 어머니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나 나이 먹어서나 어머니와 다정하게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눈 적이 없다. 할 말이 있거나 필요에 따라 의사를 전달하기는 했지만 마음을 실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25년이란 기간 동안에도 한번 버릇된 이런 태도가 바뀌지않아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께 다정한 말 한마디 드리지 못했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해외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셨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4학년이 되던 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얼마 더 사시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병환이 깊어져서 어머니는 아주 병석에 몸져누우셨다. 집안 어른들도 만류했지만 나 자신도 그런 어머니를 팽개치고 공부한다고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오직 당신 한 분만이 내 계획이 어긋날까 봐 걱정이셨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독자라는 이유로, 나는 남들이 모두 가는 군대 징집을 면제 받았다. 친구들이 군에서 보내는 기간 동안 어머니를 위해서 지내고 병세가 좋아지면 유학을 떠나자는 것이 그 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눌러앉아 취직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는 바람에 내가 스스로  포기한 한참 뒤까지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내가 유학을 떠나지 못했다고 무척 안타까워 하셨다.
 
   아버지 없이 세 아이를 뒷바라지하여 가르치고 키워 독립시키기까지 남모르는 고통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테지만 한번도 이를 두고 내세우시지도 않았다. 어떻게 기른 자식인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흔히 듣는 보통 부모님의 넋두리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한번도 입 밖에 내시지 않았다. 그대신 아내에게 “애비는 나쁜 놈이야.”라고 몇 차례 말씀하셨다 한다.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몇 차례나 신발장을 내다 보시고는 구두가 있으면 이제 들어왔나 보다 안심하고 잠자리에 드셨다니 어디 섭섭한 일이 한 두 가지였으랴. 그러나 평소 그런 내색 한번 하지않으시다가 정 못 참으실 때 어쩌다 한번하신 말씀이었을 게다. 그러나 나를 제쳐두고 이런 말씀을 며느리에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한편 어머니의 행복이셨을 듯 싶기도 하다. 내가 어머니에게 효도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착한 아내를 만나 혼인하여 그 날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어머니를 모셨다는 것 하나 뿐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고부간에 있을 법한 갈등이 우리 집에서는 더 증폭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흔히 말하는 ‘홀 어머니에 외 아들’이 바로 나였고, 어머니의 성격 또한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나는 특히 어머니와 아내에게 고맙다. 이십년이 넘는 긴 세월 한 집에서 부딪고 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갈등이나 불화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그런 일로 나까지 불편하게 만든 기억이 거의 없다. 아내도 아내지만 그 불 같은 성격에 못 마땅한 일을 참고 견디어 내신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고작 내가 생각한 효도라는 것은 어머니 혼자 두고 어디 갈 수가 없다는 이유로 휴가 때가 되어도 집에서 뭉그적거리는 정도였으나, 사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효도도 아니었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또 다른 불만만 만드는 일이었을 뿐, 결국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됐을 터인데 그런 나를 이해해 준 어머니와 아내에게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나는 어머니 임종도 보지 못했다. 위급하게 되어 연락을 받은 시간이 출근 시간이어서 되 짚어 집에 당도하니 이미 운명하신 뒤였다. 숨을 거두시기 전 아내에게 “너희들은 착해서 잘 살 게다. 재미있게 살다가 하늘 나라에서 만나자.”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셨다니 나는 아내 덕으로 더부살이 효자가 되었지만, 이것은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이거나 아들에 대한 관용일 뿐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흔 둘에 낳은 자식이 손자 셋을 안겨드렸다는 게 하나 내세울만한 효도였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라면 말이 되지만 내 능력이나 의지와는 동떨어진 일이다. 그것도 당신의 명이 길어서 누리신 기쁨이었지 다른 분처럼 일찍 세상을 뜨셨으면 모르셨을 일이다.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근력이 달리실 연세에 드센 손자 놈들 등살에 힘이 드셨을 수도 있다. 돌아가실 무렵 맏손자가 대학을 졸업해 군에 가있고 두째와 셋째가 모두 장성하여 대학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대견해 하셨으니 그나마 여한 하나는 줄이셨겠지 생각하는 정도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실 때 굿을 해보자는 직장 동료 분들의 권고가 듣기 싫다고 어머니가 나가기 시작한 곳이 천주교회였다. 굿해서 병이 낫는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셨을 터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을 두고도 당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은 분이었다. 일단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서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신앙 안에서 사셨고 온갖 교회 활동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로 인해 우리 삼 남매는 세례를 받았고 아버지도 병세가 좀 수그러진 다음 영세를 받으신 뒤 세상을 뜨셨다. 우리집안에 신앙의 불을 지피신 분도 바로 어머니였다. 외갓집은 물론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던 삼촌 집까지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성당에 나가게 된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아내의 나이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별했던 당시의 나이와 똑같다. 내가 결혼을 일찍 서두른 것도 결국 어머니 덕택이지만, 결혼이 일러 지금 우리 아이들은 모두 장성했고, 그 중 한 놈은 벌써 제 짝을 맞아들였다. 만일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내에게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딸렸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느낌이다. 이런 생각으로 아버지와 사별한 당시의 어머니 마음 한 조각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기대는 법 없었고,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채 누나들과 어린 나를 이끌고 세파를 헤쳐오셨으며 당신 삶을 통하여 곧은 정신을 보여주셨다. 그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당돌함과 당당함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내가 우리 자식에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지 둘러보게 된다.
   
                                                                                                        ( 200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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