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 그리고 지옥
출장에서 돌아 오는 비행 중 멜 깁슨 주연 '왓 위민 원트(WWW)'라는 코미디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은 광고회사의 간부, 언제나 광고주를 만족시킬 광고물을 제작해야 하는 스트레스속에 살고있다. 중역으로 승진 못해 안달하고 스카웃된 여성 상사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바쁜 사람이다. 어느날 헤어드라이어에 감전되면서 기적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알아낼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여자들의 마음을 읽어서 즐기기도 하고, 상사의 아이디어를 읽어 자기 것으로 만들고, 광고주의 마음도 읽어 관심을 독차지하며 광고 실적을 올린다. 마침내 상사를 몰아내고 그렇게 바라던 중역으로 임명되고 거칠 것 없이 뻗어 나간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번민이 싹튼다. 이렇게 남의 생각을 훔쳐 살아가도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천둥 번개 속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공상을 해 봤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편리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데이트 중에 '오늘은 한번 안아보면 좋겠는데… 그러다가 무안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이런 마음 속 고민도 없어질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알아서 척척 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제 배가 고파지는걸...'하고 생각하는 순간 "배 고프지? 우리 뭐 맛있는 것 먹자"고 식당으로 이끄는 남자,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무드가 없을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따듯한 손길로 어깨를 감싸주는 남자, '왜 이렇게 따분하지?'하고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 디스코 텍에 가서 신나게 흔들어 볼까?"하고 제안하는 남자, 이런 남자가 곁에 있다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남자가 원하는 여자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울 것이다.
옷 가게에서 옷 파는 점원이 손님들 생각을 꾀 뚫어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옷이 어울리지 않을까요?"하고 슬쩍 물어본다. '정말 웃기고 있네.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싸구려 옷을 입으라는 거야' 라는 생각을 읽는 순간 "아 참, 손님께는 이런 고급스런 옷이 맞겠네요. 이쪽 옷을 한번 입어 보시지요." 가게에서 제일 비싼 옷을 권해본다. '글쎄 괜찮은 것 같은데 레이스가 없으면 어떨까... 그냥 살까 말까' "손님 입으신 것 보니까 다 좋은데 그 레이스가 없으면 더 우아하겠네요. 맡겨 놓고 가시면 내일까지 깔끔하게 바꿔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시죠?" 어떻게 그 옷을 사지않을 수 있겠는가. 그 점원은 틀림없이 매출 1위에 특별 보너스에 초특급 승진까지 거침이 없을 것이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떨까? 범인들의 마음을 투시하는 경찰관이 있다고 하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태연한 척 늘어놓는 범인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진범인지 아닌지, 공범이 누구인지, 그들이 숨은 곳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다면 어디인지, 증거물은 어디다 버렸는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계획 범죄인지 우연한 사고였는지, 거칠 것 없이 증거를 확보하고 완벽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거짓을 꾸며대던 범인은 단 한가지 거짓말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알고있는 모든 사실을 불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그 경찰관은 곧 유명해질 것이고, 해결이 어려운 미제사건 전담으로 활동하며 무척 바빠질 것이다.
이런 저런 망상으로 혼자 재미있어 하다가, 술 한잔하고,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은 순간, 돌연 전혀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남의 마음을 안다면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길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의지와 관련 없이 모두 알게 된다면 여기서 생기는 불쾌하고 어렵고 나쁜 일은 과연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부부 싸움으로 생긴 냉전을 풀려고, 어느날 마음 먹고 아내에게 "여보!" 하고 불렀다 하자. 그런데 그 순간 '아유 지겨워. 저 영감탱이, 밥 먹었으면 잠이나 자지 왜 또 오늘은 저렇게 다정한 척 부르나, 부르길' 하는 아내 마음 속 생각을 들여 다 보았다면 더 이상 얘기할 맛이 나겠는가? 첫 입맞춤에 황홀해 할 사이도 없이 '역시 키스는 그 때 그 사람하고 했던 게 최고야. 어떻게 그런 키스를 할 수 있을까?'하는 파트너의 속마음을 읽었다면 어떨까? 지친 몸으로 퇴근하여 집에 들어 섰을 때, "이제 오셔요?" 인사하는 자식 놈의 무뚝뚝한 표정과 더불어 '컴퓨터도 못 사주는 아빠, 그까짓 회사는 다녀서 뭐하나?' 하는 속 마음을 읽었다 하자. 과연 어떨까? 회의를 소집한 상사가 '또 시작이군. 에그 이놈의 직장을 때려 치던가 해야지 원, 오늘은 저 잔소리가 언제나 끝 날까' 하는 부하직원의 마음을 읽는다면 또 어떨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우리가 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 중의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도 될, 아니 알면 알수록 불편하고 불안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두 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았다. 내 말 한마디, 내 행동 한가지에 따라 셀 수 없이 여러 갈래로 바뀌어 갈 주위 사람들의 각각 다른 생각과 속 마음을 모두 읽는다면, 어떻게 그 다음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상대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줏대있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남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해도 생길 수 있으나, 그 때문에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상대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는 다면 다른 사람을 관용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곁에 걸어가는 말짱한 신사 차림의 인간이 품고 있는 사악한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본다면, 거짓말을 시키며 고소해 하는 날씬한 아가씨의 삐뚤어진 마음을 읽는다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마음을 바뀌는 대로 안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한 순간의 평화도 안정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창조주가 나더러 "네 마음대로 지옥을 설계해보아라" 라고 허락한다면 나는 그곳에 온 사람들의 입과 발을 묶어놓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초능력과 말을 듣는 귀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하겠다. 미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보고 듣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남이 생각하는 것, 마음 먹은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도 했다. 같이 앉아 이야기하다가 상대편의 눈빛이나 안색이나 표정이나 태도가 달라지면 왜 그럴까 궁금해진다. 지금 지루해 하는 것일까? 듣기 싫은가? 혹 내가 마음을 상하게 했나? 다른 일로 기분이 나쁜가? 아니면, 시간 약속에 바쁜가? 하고 상대방의 마음 속 변화를 읽으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정 그것이 궁금하면 물어 보기도 한다. 설령 듣기 싫은 마음을 감추고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댄다 하더라도 이해하고 지나간다. 남의 진짜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고, 남에게 속아 넘어가더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맛이 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길래 ‘WWW’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재미있어 한다. 그런데 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모르는 무리가 있다. 바로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툭하면 갔다 붙이는 관용구 "민심에 따라...." 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민심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만 모른다는 사실을. 그 민심이 어느 민심인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제 주장에 이 말을 갖다 붙이는 사람들에게 진짜 민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싶다. 그들을 내가 설계한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진짜 민심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WWW’를 보고 나서 나는 이런 쓸데없는 공상을 해봤다.
(2001.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