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산수
내 자랑을 하나 해야겠다. 한 15년쯤 됐을까, 나는 한가지 신통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다달이 거르지
말고 적어도 책 다섯 권을 읽자는 결심이었다. 그 뒤, 10 수년간 크게 어긋남이 없이 이 결심을 실행해 오고 있다. 물론 '책 읽는 것'은 무조건 잘하는 일이라는 가정과 '한 달에 다섯 권 읽기'는 책을 많이 읽는 축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이것은 자랑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책 저책 닥치는 대로 읽는 내 독서습관을 생각할 때, 또 한 달에 다섯 권 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이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게 많을 터인데, 그까짓 책 다섯 권 읽는 것 가지고, 그것도 다섯 권 채우느라 몸부림을 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생각해 보면 이건 자랑이랄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마저 뺀다면, 자랑거리라고 그나마 내세울 것이 따로 없어서 언제부터인지 스스로 책 읽기를 내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한 계기는 이렇다. 한 15년쯤 전 회사 일로 영국 런던에 출장 갔을 때 일이다. 그곳에서 거래 투자은행과 상담을 마치고 그 은행 중역과 어울려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것 저것 묻는 말에 답변하며 마침내 식사가 끝날 즈음, 나는 문득 이렇게 질문만 받는 피동적 대화 밖에 할 수 없는가 하는 오기가 발동하였다. 그러나 화제가 풍부하지 않은 나는 물어 볼 말이 궁색하였고 결국 출퇴근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는, 단답형 답변이 뻔히 예상되는 질문을 던졌다. 그 무렵이 마침, 인천으로 발령 받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느라고 매일 서 너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좀 엉뚱한 내 질문은, 그러나,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듣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주 열심히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이야기인즉 런던도 서울처럼 시내 건물에 대하여 차량 주차 대수를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건물 평수에 따라 최소 주차장 면적을 제한할 것이라는 내 지레 짐작과는 달리 런던은 그 정반대였다. 내가 방문한 그 투자은행은 20층이 넘는 큰 자체 건물을 사옥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 회사에 허용되는 주차대수가 겨우 3대라는 것이었다. 대형건물의 최대 주차 대수를 제한하여 도심 교통 문제를
완화하기 위함이라 했다. 따라서 직위에 관계없이 어떤 사원도 승용차로 출퇴근 할 수가 없고, 그 주차장은 회사에 오는 손님용으로 활용한다는 설명이었다. 그 순간 이런 역발상도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시내로 출퇴근하는 수단은 오로지 대중교통 밖에 없고, 그는 출퇴근에 버려지는 시간이 아까워서 몇 년 전에 걸어서 회사에 오갈 수 있는 도심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출퇴근에서 절약된 시간을 일이나 자기 개발을 위해 쓰겠다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실은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만나 펍에 가서 맥주나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데 쓰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늦잠이나 자고 시간을 최종 순간까지 미루는 못된 습관만 생기고 더욱이 공해로 가득찬 도심 생활이 건강에도 도움이 안되었다, 몇 년 이런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 최근에 큰 결심을 실행했는데 그것은 런던에서 기차로 한시간 반이 걸리는 시외로 훌쩍 이사를 결행한 것이었다, 당연히 아침 기차시간을 놓치면 지각이어서 늦잠은 생각할 수도 없고 저녁에는 정해진 기차시간까지 차분히 회사에서 일을 정리하게 되었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과 식사시간 또한 일정해졌다, 뿐만 아니라 시외 한적한 곳에 널찍한 집을 갖게 되어 옹색했던 도심의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활이 쾌적해졌다, 공해는 완전히 사라졌고 청정한 바람과 맑은 햇살에 가슴까지 툭 트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 세시간이, 매일, 에누리 없이 생긴 것이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책을 읽기로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그 동안 미루어 놓았던 읽어야 할 읽고 싶었던 책을 기차 안에서 읽고 있는데 그 양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같은 기쁨에 흥분되어 있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호텔로 돌아 온 나는 생각에 빠졌다. 남들은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자기 스스로 회사에서 멀리 이사를
하고 거기서 생긴 여러 가지 이점을 저렇게 활용해 가고 있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출퇴근하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 내내 짜증만 내고, 하루 빨리 회사 근처로 옮겨야 겠는데 아이들 학교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이 놈의 경인 고속도로 공사는 도대체 언제나 끝나게 되는 거야, 등등 이런 불평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이렇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쌓아 가는 동안, 세상 한
구석에는 책 읽을 시간을 갖기 위해 회사로부터 일부러 먼 거리로 집을 옮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것이 내가 매월 적어도 5권 이상의 단행본을 의무적으로 읽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자가운전이란 허울 좋은 명분으로 한동안 유보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승진과 더불어
운전기사가 배정되었고, 그 날로 나는 자동차 안에 독서등을 설치하게 하였다.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였다. 여름철에는 괜찮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새벽 6시 출근, 저녁 9시 귀가 시간대엔 어둠이 깔려 책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출퇴근 시간을 책 읽기에 쓰기 시작하였다. 달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눈도 아프고 피로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졌다. 지금은 이것이 습관이 되어 차 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면 어딘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됐다.
5 X 12 = 60, 60 X 20 = 1,200, 60 X 30 = 1,800. 이것은 초등학교 산수 계산이다. 1,200 권이든 1,800권이든 누가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이 '티끌 모으기'는 한번 시작해서 습관될 때까지가 약간 힘들 뿐 그렇게 어려운 일도, 못해낼 일도 아니다.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를 다녀 온 사람들은 그들이 전철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또는 공원에서도 심지어는 식사하면서 까지도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학교 교문을 나서는 순간 그 징그러운 책에서 눈을 돌리고 마는 것이, 그러나, 우리네 안타까운 모습이다. 왜 그런지를 여기서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어깨를 겨루고 경쟁해야 될 사람들이 그들이라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들은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삼국지를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삼국지를 열번 읽은 사람 또한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씀 말이다. 삼국지를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래서 친구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반대로 통달한 사람은 지략이 뛰어나 손해 볼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일까? 어쨌든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이 생각의 깊이이든, 삶의 지혜이든, 활동의 폭이든, 남을 설득하는 힘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아마 이것을 두고 옛 어른들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들 무엇하랴. 읽는 대로 잊어버리는,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읽어야만 겨우 남들과 같아질지 말지 할 나 같은 사람에게 맞는 말은 아니겠으니...
나는 올 4월부터 천안의 한 아담한 회사에 근무해 오고 있다. 문 앞부터 깔끔한 산책로가 시작되는, 봉서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아파트로 집도 옮겼다. 서울 인천을 오갈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회사를 오가는 길은 차량 통행도 붐비지 않은데다가 거리마저 가까워 15분이면 넉넉하다. 출퇴근이 이처럼 쾌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쾌적함에 불구하고 최근 나에게는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름아니라 책 읽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좁고 답답한 승용차 안,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습관처럼 해 온 일인데 아침 혹은 저녁에 책 한 권 들고 조용한 봉서산 능선을 따라 산책하다가 서늘한 그늘 벤치에 앉아 한 시간쯤 책을 읽자,고 생각한 것이 벌써 오래건만 아직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 나는 셈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더 미루지 말고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그 어디서든 나는 책을 다시 잡아야 한다. 이것 저것 다 안되면 다시 대전이나 분당쯤으로 이사를 해야만 한다.
( 2001.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