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먼저 신묘년 새해에 모든 회원들과 그 가정에 날마다 행복하고 <안심>한 날이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스님 말씀 :
“죽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러니 몸이 아프다고 미리 겁먹고 죽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먼저고 현실은 나중이다. 마음을 행복한 사람처럼 가지면 나중에 현실적으로 행복해진다. 행복할 여건이 돼야 마음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먼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온다.”
항상 마음을 행복하게 가지는 법우들이 되기 빕니다.
새로운 기분으로 맞이하는 신묘년 새해 첫 법회는 공교롭게도 호주에서 일시 귀국한 이갑순 동문 환영회와 시간이 겹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석자가 적었다.
법회 요일을 다른 요일로 바꾸자는 제안이 있어서 이번에 의논해서 결정하려 했으나 성원 미달로 연기했다.
철인 스님 법문 - 보살과 보리심
요즘 뉴스를 보면 마음이 아주 무겁다. 구제역과 조류 독감 때문에 생매장 당한 가축들이 오늘 14일 현재 1백 60만 마리가 넘는데 안락사를 시키지 않고 산 채로 땅에 파묻는 광경에 가슴이 콱 막힌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불교의 살생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 동물과 벌레까지 죽이는 것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 많은 가축을 무자비하게 산 채로 죽이는 건 엄청난 살생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죽여서는 안 된다. 중생(衆生 :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축은 사람이 전생에 지은 큰 악업(죄)에 따라 업보를 받고 축생으로 태어난 생명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처럼 귀중하다.
앞으로 구제역에 걸려서 죽을지 모르는 다른 가축의 목숨 보전을 위해 위험한 가축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는 일리가 있지만, 아무리 시간이 급하고 죽여야 할 숫자가 많다 해도 생명 경시는 안 된다. 귀중한 생명체임을 인정하고 안락사를 시켜서 정성스레 묻어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구제역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불교의 핵심 단어인 보살에 대해 설명하겠다.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등 많은 보살 들이 있다. 여자 불교 신도를 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살이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의미로 붙이는 존칭일 뿐, 진짜 보살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보살이란 보리심을 가진 사람,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불에 의해 발심하여 깨달으신 분, 보리심을 얻으신 분이다.
보리심= 보리 + 마음이다. 보리는 깨달음이다. 無明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것, 탐진치(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라는 三毒心에서 벗어나 안락한 마음이다. 지혜가 생기면 자비심도 따라온다. 보리심을 발하면 자비광명이 나타나고, 원력(願力: 큰 바람. 맹세, 보살들의 원력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맹세)도 따라온다.
이 세 가지를 지혜광명 자비광명 원력광명이라 한다. 광명은 무명의 반대 개념으로 무한히 밝은 빛이며, 어리석고 어두운 것이 사라진 보리심의 경지다.
깨달음은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중생은 번뇌에 싸여 어두운 무명의 세계에서 사물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한다.
번뇌는 탐진치에서 온다. 貪(욕심)은 無我(‘나‘라는 생각이 없음)를 갖지 못한데서 온다. 달이 연못에 비칠 때 어리석은 사람은 연못에서 달을 만지거나 꺼내려한다. 그러나 뜻대로 안되니 욕심이 생긴다. 이것이 탐이다. 욕심이 충족 안 되니 진(瞋: 성냄)이 생긴다. 그 욕심과 성냄의 원인을 모르는 게 치(痴: 어리석음)이다. 모든 죄는 탐진치에서 온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달은 허공에 있음을 안다. 달을 따려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갖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커지면 탐욕심이다. 탐욕과 지혜는 종이 한 장 차이, 동전의 앞 뒤 같다.
이들 탐진치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언가 강력한 것이 필요하다. 바로 無常 無我라는 햇빛이 필요하다. 부처님 가르침인 삼법인(세 가지 진리) 중에서 제행무상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변한다), 제법무아(‘나’라는 존재는 본래 없음)를 확실히 깨달으면 지혜가 키워지고, 그를 위한 실천 방법은 수행을 하는 길 뿐이다.
이런 수행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게 보리심이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이나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었다고 집이라 하지 않는다. 무상 무아도 집짓는 이치와 같다.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실체다. 집(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나’는 절로 탄생한 게 아니라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주변의 여러 사람과 환경에 싸여있는 실체임을 알면 나를 내세우지 않게 된다.
제행무상,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며 영원한 게 없다는 것, 제법무아,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보리심이고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
그 자리에서 지혜광명, 자비광명, 원력광명이 나타난다.
탐욕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탐욕이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탐욕은 자비심으로 예방이 된다. 자비는 남의 말을 잘 듣는데서 시작한다. 남의 괴로움을 잘 들어주는 것이 자비의 시작이다. 남이 고통을 호소할 때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끝까지 잘 듣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야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도움이 자비다.
남의 말을 잘 안 들으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며, 자비심이 생길 수 없다. 큰 스님들은 누가 말하면 아무리 오래 얘기해도 말없이 끝까지 들으시고 마지막에 한 말씀 하신다. 그 말씀 한마디가 그 사람을 구하는 자비다.
탐욕이 원력으로 변하면 곤란하다. 무얼 달라고 기도하는 건 탐욕이며 원력이 아니다. 지혜로운 욕심은 탐욕이 아닌 원력이고, 지혜가 없는 욕심은 탐욕이다. 지혜로운 원력은 남을 이해하고 도와달라는 힘이다.
이렇게 지혜와 자비와 원력이 합쳐진 광명의 세계가 보리심이며, 보리심을 얻은 분들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등 여러 분의 보살님들이다. 그 보살님들은 지금도 지혜와 자비 광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중생들을 구해주시겠다는 큰 원력을 세우고 도와주고 계신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