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울긋불긋하게 산과 들이 꽃동산을 이루는 아름다운 계절, 5월에는 또 부처님 오신 날이 있어 더욱 성스러운 달이다. 이달 21일 (음 4월 8일)은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기독교는 예수 탄생 해를 기준으로 삼지만 불교는 부처님 열반(임종)하신 해부터 연호를 따진다. 부처님은 81세에 열반하셨으므로 탄생 싯점으로 보면 2600년이 넘는다.
불심이 약한 불자도 이날에는 절에 가서 법회에 동참하고, 그 달에는 전국 3寺 순례를 하면서 절에 연등을 단다.
이번 법회 법문도 석가탄신에 관한 것이어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다음달 6월 11일에는 관동 8경의 하나인 동해안의 절경, 양양 낙산사와 말사인 홍련암 휴휴암으로 성지 순례를 떠날 예정이며, 차를 대절할 것이다. 참석 희망자는 회원이라도 꼭 미리 예약 바라며, 비회원인 동문도 누구나 일체 부담 없이 환영한다.
세부 사항은 추후 알릴 예정.
묘적 스님 법문- “天上天下 唯我獨尊 ”
법회에 앞서 먼저 내 얘기를 잠깐 하자면, 벌써 3년째 선우회 법사로서 법회를 했는데 그동안 선우회 덕분에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박사과정 수업을 이달로 마친다. 수료는 하지만 논문 작성을 아직 안 했고, 전공이 중국의 禪인데 중국 자료를 충분히 갖지도 못했고, 중국어에 통달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올 12월부터는 중국으로 가서 중국식 한문 공부와 자료를 더 수집하여 논문을 쓸 계획이다. 따라서 11월까지만 법회를 맡겠다. 그동안 이 자리에서 법회를 하기 위한 준비 차 나도 공부할 기회가 더 생겨서 좋았는데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 서운하다.
여러 분이 잘 알다시피 부처님은 고대 인도 가필라성 성주인 정반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야부인은 결혼 후 오래 동안 출산을 못했다가 어느 날 하얀 코끼리가 몸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이 됐다.
그리고 예정일이 다가오자 출산하러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옆구리로 부처님을 낳았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는 예수나,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부처님의 이 신화는 성스러운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화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당시 인도에서는 신분을 4계급으로 구별했고 왕족은 몸으로 보면 오른 편 가슴과 옆구리라고 표현했었다. 그러니까 부처님(싯달 태자)가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왕자라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기 부처는 태어나시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걷고 오른 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잘 못 해석하면 하늘과 땅에 오직 나(부처님) 한 사람만 존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 뜻은 부처님이 이 땅에서 장차 고통 받는 중생을 구하시겠다는 일을 하시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나’는 부처님 뿐 아니라 이 우주의 모는 사람 개개인이 모두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 부처라는 말로 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성년이 되자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고행을 시작하셨다. 나무 밑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 꼼짝 않고 계시면서 오직 호흡만을 바라보는 수식명상법으로 수행하셨다. 아침에는 탁발(걸식)을 다니는데 한집에서 음식을 두 숟가락 이상 받지 않으셨고, 일곱 집 이상 다니지 않으셨다. 그렇게 구걸한 음식으로 하루 한 끼만 드셨고, 굶거나 나무 열매로 요기하기도 하셨다. 이렇게 오직 수행만 열심히 하는 부처님 곁에 나중에는 다섯 남자가 함께 수행에 참여했고, 그들이 최초의 불제자 비구들이다.
이런 치열한 고행 끝에 6년만에 보리수 아래에서 마침내 성불하셨다. 보리수는 원래 보리수 나무가 아니고, 보리(깨달음이란 뜻)를 얻은 나무라는 뜻으로 원래 다른 이름을 보리수로 바꿔 부르게 된 나무다.
불교의 수행법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성을 깨달아 누구나 부처가 되자.”는 대승불교가 있고, 부처님이 수행하신대로 수식법(修息法: 자신이 호흡하는 상태를 관조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방법)을 하는 소승불교 방식이 있다. 지금도 남방(동남아)에서는 부처님이 하신대로 수식법으로 참선 명상을 한다.
대승불교는 지나치게 불성을 강조하는 게 단점이다.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불성 찾기가 결단코 쉽지가 않다.
수행의 중심은 각자의 몸이다. 몸을 바로 보자는 것이다. 몸 상태를 바로 보기 위해 호흡을 관찰한다. 몸에 심한 고통을 주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시고 부처님은 고행을 택하셨다. 그러나 6년 고행후에 고행에서 남는 건 육신의 고통 뿐임을 깨달으셨다.
요즘도 깊은 산중 선방에서는 눈 맑은 스님들이 참선 명상으로 수행하는데 선승들이 일반 사찰의 스님에 비해 고생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세끼 공양 제공 받고 아프면 고쳐주고, 혼자 열심히 수행만 하면 어려움이 없다.
수행하는데 나이와 신분 장소에 따른 제한은 있을 수 없다. 늘 내가 강조하듯이. 지금 나이의 시작도 늦지 않다.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건 각자 나 자신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사는 일반 인이나, 수행자이면서도 TV를 보며 즐거움을 얻는 나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세속적 삶을 버리지 못한다.
세속적인 즐거움은 끝이 있다.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나 참된 수행으로 불법을 깨닫고, 거기서 얻는 즐거움은 영원히 지속된다.
세속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단 한 가지라도 지금부터 실천하여 생활에 변화를 가지면 먹고 마시는 그런 즐거움보다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바른 생각을 가지려면 바른 몸이 필요하다. 우리 몸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해탈, 깨달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너무 몸이 편하면 수행이 제대로 안 된다. 너무 편하면 무기력해진다.
스님들의 법문은 영화나 다른 취미활동보다 재미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수행하고 절에 다니는 건 그런 일에서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이다. 단순하고 짧은 재미 보다는 영원한 안락을 얻기 위해서다.
수행은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영원히 사는 법, 해탈하는 법,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은 스스로 오로지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다음 법회까지 숙제를 주겠다.
“오늘 이 시간 이후 수행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매일 자기 전에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한 번씩 읽었는지? 어떤 보시를 했는지? 절에 열심히 다녔는지? 나쁜 일을 당하고도 이나마 다행이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는지?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했어도 편안한 마음으로 만족했는지? 등등 좋은 변화가 있었다는 답이 나오기 를기대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가장 존귀한 존재는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내가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큰 변화가 아니라도 작은 일부터 바꾸어 습관적으로 실천해보자.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