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12일 법문은 전날 열반하신 법정 큰 스님의 열반으로 시작했다.
평생 동안 無所有를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나라의 큰 스승 법정스님, 부디 왕생 극락하소서. 스님은 가셔도 스님의 가르침은 이 나라 중생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잠시 후 다비식(불교식 화장)이 시작되는 스님, 영원히 남은 중생들을 지켜주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마침 음력 2월15일(올해는 양력으로 이달 30일)이 부처님의 열반일이라 다소 무거운 주제인 열반경 내용을 중심으로 열반의 의미와, 우리는 어떻게 그 의미를 소화하고 살아야 하는지가 법문 화두였다.
참을 일이 많은 이 사바세계에서 오늘도 참을 게 아주 많은 날의 하루였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며 흘러가기를 바랄 수 밖에...
묘적 스님 법문- 열반의 의미
이달에는 불교의 齋日 중에 중요한 날이지만 많이 소홀이 하고 있는 두 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음력 2월8일 부처님의 출가재일과, 음력 2월15일 열반재일입니다. 바로 어제 11일 우리나라의 큰 스님 중의 한 분이신 법정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죠. 작년에 김수환 추기경, 올해 법정스님.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와 덕망을 쌓으신 두 분 큰 별이 연속으로 돌아가셔서 너무나 아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반의 의미와, 열반하실 때 남기신 유훈을 적은 열반경을 중심으로 우리는 어떻게 열반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할 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지난달 법문 때 불교에서 하는 모든 수행은 생사윤회를 끊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열반(涅槃, Nirvana, 원어의 뜻은 불을 꺼 없앤다는 뜻)이라는 것은 번뇌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 업을 생성하지 않기에 윤회의 동력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서 깨달음을 얻은 것을 반 열반, 비로소 죽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이 실제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원래 열반은 근심의 불을 꺼버려서 번뇌와 고통 근심 일체가 없이 완전히 평화로운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이나, 깨달은 최고의 수행자가 별세함으로써 열반에 이를 수 있다하여, 부처님과, 우리나라의 성철 스님이 세상을 떠나신 것을 열반에 드셨다고 표현했음. 법정 스님께서 세상을 뜨신 것을 언론에서는 입적이라 했지만 入寂은 일반인이나 보통 스님의 별세를 ‘고요한 곳으로 가셨다’고 격을 낮춘 호칭이며. 불교계 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존경하는 큰 별이시므로 법정 스님도 열반이라하는 것이 옳을 것임)
莊子의 제물론을 보면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여희(麗姬)라는 미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 그녀가 사는 곳이 침략을 받았는데 워낙 미인이라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진나라 황제의 후궁까지 됩니다. 가기 싫어 너무 울어서 눈물에 옷깃이 젖을 정도였는데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갖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죽음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죽기를 두려워하지만 막상 죽은 후 도달하는 열반의 세계가 바로 여희가 얻은 행복 같은 그런 세계일 수도 있다는 비유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남기신 말씀을 후세 제자들이 기록한 <열반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이미 다겁생 전에 불도를 이루셨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화현하셨다합니다.
부처님의 유훈에서도 보듯이 화신으로 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중생들에게 진리를 설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잘 아시다시피 인도 가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시고 , 29세에 출가, 6년간 고행 끝에 35세에 득도(성불), 36년간 설법하시고 81세에 어느 마을에서 순타라는 사람이 드린 우유죽을 드시고 식중독으 로 열반하셨습니다.
열반하실 때 근심에 차서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남기신 내용을 기록한 게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에 있는 내용처럼 부처님은 諸行無常(모든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 一體皆苦(모든 것은 고통이다), 諸法無我(본래 나라는 법은 없다)는 법을 설하시기 위한 것이죠. 모든 것은 변해도 오직 이 법은 항상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실천하는 것의 기본은 바로 불법승입니다.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 그가 되려고하는 수행자들을 공경하고 믿는 것이 기본일 것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보니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기독교 운동선수들은 기도하거나 가슴에 성호를 긋는 등 종교 세리머니하는데 불교는 유독 세리모니가 없느냐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댓글이 “불교는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깝지 않냐.”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종교의 특성 중 믿음의 부분이 불교에서 약하지 않는가 하는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타 종교는 절대자, 신에 대한 믿음인 반면 불교는 바로 불법승에 대한 믿음, 부처가 있다는 걸 믿고,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열반경에도 불법승을 모신다 하더라도 계행이 청정하지 않고 삿된 이에게는 예배하거나 공양할 필요가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열반의 경지는 常樂我淨(항상 같고 즐거우며 그 주체는 나이고 진실로 청정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悉(실)有佛性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극악무도한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라고 걱정스레 질문하자 부처님은 “불법승을 존중하고, 法燈明 自燈明 法歸依 自歸依 네 가지에 의지하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잘 알아두고 실천해야할 부분이겠습니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며,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대승경에 의지하고 소승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인 법신인 것입니다. 이 말은 쉬운 네 가지에 의지하는 힘이 바로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또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남의 집에 갔는데 얼굴이 미인이고 좋은 옷을 입고 있어서 누군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공덕천(功德天)이라는 사람으로 찾아가는 집에 온갖 보물이 생기게 한다 하여 주인이 반갑게 집에 들여 대접했습니다. 조금 후에 또 한 여인이 찾아왔는데 흑암천(黑暗天)이라 하며 못생긴 얼굴에 지저분하게 생겨 가는 집에 재산을 없애버린다 했습니다. 주인이 쫓아 내려하자 공덕천이 자기 언니이고 둘이는 항상 같이 다니기에 자기를 내쫓으면 언니도 내쫓는 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꼭 따라다니고, 슬픔이 있으면 꼭 기쁨이 따라오는 것이기에 즐거워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픈 일에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반경에는 인도의 귀족계급인 바라문의 한 아들이 하도 배가 고파서 길가의 똥속의 과일을 씻어먹으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꾸짖자 깨끗이 씻어서 다시 버리려 했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적혀있습니다. 생을 기뻐하는 것도 죽음을 슬퍼하는 것도 마치 똥속의 과일을 먹으려고 주었다가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가 바로 4무량심입니다. 그 네 가지는 大慈(남을 사랑하는 마음), 大悲(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는 마음), 大喜(남을 크게 기쁘게하는 마음), 大捨(남에게 차별하는 생각을 버리는 마음)입니다. 大捨는 큰 버림인데 법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자기의 기쁨을 남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부처님께서 대자대비심으로 중생의 오욕락을 충족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도와줄 마음이 나지 않고 그리되면 돕지 않기에 기쁜 마음이 없으니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육바라밀에서 보시가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시할 때도 보답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어야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매일 아침 마을로 가서 꼭 일곱집에서만 음식을 얻어 많으면 많은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하루 한끼만 먹었는데 제자들이 많이 얻으려고 부자집 일곱집으로 다니자 가난한 집도 차별 없이 무조건 일곱 집을 돌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大捨입니다.
大喜는 즐거움으로 살 때 오욕락이 충족되는 즐거움이 아니라 열반의 즐거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여서 같이 정진하고 법문을 듣고 좋은 이야기를 나눌 때의 즐거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열반이란 번뇌를 끊는 것이라기보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번뇌가 바로 생사의 마음이므로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성철스님, 법정 스님의 임종을 열반이라고 경칭하는 것처럼 열반은 깨달은 분이 임종해야만 도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이 뜻을 세워 법에 의지하고 성인이나 부처님을 가까이 하고 고난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는 동안에도 충분이 가능합니다.
법정스님이 평생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세 글자 ‘무소유’라는 법에 의지해 여러 분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선우회에 나오시는 분들과 같은 좋은 도반들을 즐겨 만나시고 가까이 있는 스님들을 자주 만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