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배동으로 신 사옥을 지어 이사한 불교TV 무상사에 지난 6일 갔었다. 무상사는 케이블 TV인 불교방송이 녹화를 위해 마련한 법당인데 마포에서 방배3동으로 이전했다. 여기서 주요 프로그램의 공개녹화가 진행되며 일반 사찰처럼 사시 예불과 법회, 재도 열린다. 공개녹화가 되는 법문, 교리강좌 등에는 200여명의 불자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법당을 메운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 큰 스님 초청 법문이 있는데 6일에는 파란 눈의 수행자 현각 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서 갔다.
현각 스님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고, 미국에서 포교하시던 숭산 스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하고 한국에 와서 출가하셨다.
한국에서 화계사 등에서 18년간 수행을 하시다가 4개월 전에 독일로 가셔서 아주 작은 선원을 마련하시고 유럽을 상대로 포교를 하시는 중 일시 귀국하셨다.
나도 법당 입구에 앉아 있다가 스님이 법상으로 가시면서 잠시 스님의 장삼 자락이 나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옷깃을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는 말처럼, 실제로 스님의 옷깃이 스쳤으니 아미 전생에 나와 스님도 인연이 있지 읺았을까. 이제 40대라는 연륜이 보이기는 하지만 역시나 꽃미남 스님이다. 우리말도 아주 익숙하시다.
1시간 동안 들은 법문을 소개한다. (무상사 전화: 3270-3333)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어제 밤 이 법문을 위해 유럽에서 왔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眞我를 찾기 위해 오신 것을 감사한다.
나는 18년간 한국에서 수행하다가 한국 불교를 유럽에 알리기 위해 4개월 전부터 유럽에서 포교 중이다. 많은 이들은 불교는 아시아의 종교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불교는 이미 400여 년 전에 유럽에 소개됐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배운 쇼펜하우어의 철학론에는 전 세계의 종교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이 상당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그 종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내 마음에 드는 종교가 있는데 바로 불교다. 누구나 끝까지 공부하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그 부분을 읽고 공감하며, 동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철학자는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유럽에 소개된 불교 경전을 이미 읽고 그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던 것이다.
유럽에는 200여 년 전까지 불교경전이 지식층에 널리 퍼졌는데 아쉽게도 그 후 세력이 약화됐다.
그 토대위에 다시 불교를 , 그 중에도 한국 불교를 알리기 위해 독일에 선원을 차렸다. 선원이라야 10명이 앉으면 자리가 꽉 차는 아주 협소한 공간이지만 그저 “무조건 시작할 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독일에서 인터넷으로 보니 여배우 장진영이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나이에 그 시간 숨이 끊어질 것을 누가 알았는가. 우리는 모두 내일을 모른다. 아무도 우리 삶을 보증하지 못한다. 앞 일을 모르면서 우리 중생들은 100년을 살 것처럼 생각한다. 이처럼 남의 죽음을 보고도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는 공부와 수행은 필요하다.
어제 어느 대학입시 설명회에 많은 어머니들이 참석하여 설명서를 열심히 읽는 사진을 보았다. 학교에서는 신종 플루 때문에 개학을 늦추거나 휴교 중이고, 집단 모임이 취소 또는 지연되는데 이 어머니들은 그런 공포는 버리고 오직 자식을 위한 모성애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면이다.
이런 열의로 수행을 열심히 하자.
우리의 몸도 시시각각 변한다. 전철에서 나를 본 어떤 분이 “늙었다.”고 했다. 사실 나도 여러 분도 모두 늙어간다. 우리 몸에 수억 개의 세포가 있지만 7년이면 100% 교체된다. 그러니 얼굴이나 몸은 점점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은 이렇게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칸트는 “인간은 토굴 속에서 체인에 얽혀 산다. 토굴에서 벗어나면 처음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잘 보지 못하다가 차차 사물을 있는 대로 보게 된다.”고 했다.
부처님은 “깨어지지 않고, 보이는 대로만 보지 말고, 배우는대로만 배우지 말라, 제대로 보지 않으면 토굴 속 삶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 들은 익숙한 시각과 익숙한 인식에서 벗어나야만 참다운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3배는 감사의 뜻이다.
오래 전 도반과 해인사에 갔을 때 일이다.
너무 큰 사찰 규모에 놀라면서 경내를 다니는데 한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나에게 “미국 스님께서 한자를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영어 불어 등 6개국어는 알지만 한자는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 스님은 다시 “부처님 가르침을 적은 게 팔만대장경인데 그건 모두 한자로 씌었습니다. 한자를 모르면 불교 공부를 할 수 없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잠시 후 그 스님은 차를 한 잔 같이 하자고 해서 같이 자리에 마주 않았다. 그때 나는 조심스럽게 “스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한자를 몇 개나 아셨습니까? 그리고 혜능스님(無學의 나무꾼에서 출가, 확철대오한 중국의 큰스님. 달마대사의 法統을 이은 6대 스님)은 일자무식이라고 배웠는데 한자를 몇 개나 아셨습니까?”
이 질문에 그 스님은 얼굴이 벌개져서 아무 말 못하시고 “흠, 흠” 하고 헛기침만 하셨다.
불교는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법을 알고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하는 가운데 변치 않는 참 모습을 보아야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의심을 가지고 끝없이 탐구해야한다. 변하고 변하는 세상 모든 것 중에서 진정 변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의심을 품고 찾아야한다. 이러저러한 여건을 따지면서 게을리 하지 말고, 하루 10분만이라도 이 의심을 풀려 노력해야한다. 그 짧은 시간에라도 108배를 올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