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촉촉이 대지를 적시던 단비가 그치고 꽃샘바람이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게 한 13일 오후, 13명이 모였다. 늘 바쁜 이원구 변호사까지 모였으니 ‘魔의 13일의 금요일’이라는 날이 실제는 길일인가?
우리 스님도 이번 학기부터 이원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청호불교문화원의 장학금을 받으시게 되어 박사 과정 마칠 때까지 등록금 걱정을 덜게 되셨다. 즐거운 오늘 모든 것에 감사한다.
오늘 스님 법문은 우리들이 남은 생애 동안 어떻게 수행하고 죽음에 대비할 것인지 수행에 대한 것이어서 피부에 닿았다.
참석자 : 김군승 김두경 박상규 송인식 이원구 류진희 박미자 박정애 이향숙 이효숙 정영숙 정채영 홍사순 13명
묘적스님 법문 - 깨달음을 향하여
불교 용어에 無我라는 게 있다. 글자 그대로는 “내가 없다.”라는 뜻이지만 실상 지금 나는 여러 분 앞에 존재하고, 여러 분도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내가 없다는 건 틀린 말 같이 생각된다. 내가 없다는 건 “나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나라는 고정관념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부처님 말씀에 어느 장자의 세 아들 얘기가 나온다. 장자의 집에 큰 불이 났는데 철모르는 세 아들은 마당에서 열심히 장난만 하고 놀고 있었다. 불이 났으니 피하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했다. 우리의 삶도 이 아이들 같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다 병들고 죽는다. 내 마음은 원치 않지만 죽는다. 잘 살든 못 살든, 자식들이 잘 되든 못 되든 누구나 죽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세상에 없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40대 교수인 스님이 외형으로는 건강하신데 실제로는 폐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겉모습과 보이는 모습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無我의 개념이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전생의 업에 대한 인과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분 지금 나이에 전생의 업을 얘기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제 대부분이 자녀들을 결혼시켰고 자녀 걱정도 거의 덜었다고 본다.
이제 할 일은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을 초연히 맞는 마음의 준비를 할 때다. 우리는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 無我이므로.
그렇다면 영원히 사는 법은 없을까?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죽은 후 永生한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不生이라고 가르친다.
불생이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태어나서 여기 있는데 이게 무슨 궤변이냐 하겠지만 불생은 물리적인 태어남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 참 나는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임을 알자.
사람의 수명이 30살이나 60살이나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1천년이라는 긴 시간 입장에서 보면 그 둘은 다 같이 짧다 하루살이 수명은 하루이니까 허무하고 짧지만 그건 사람의 시각일 뿐 하루살이는 자기 수명이 짧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짧고 긴 것은 우리의 고정 관념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현실도피적인 명상이나 돈, 물질적인 풍요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큰 스님들은 죽음에 초연하시지만 그 경지는 스님만이 아니라 중생인 여러 분도 그 경지에 갈 수 있다. 스님과 일반 중생들의 차이는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차이에 불과하다. 때로는 비전공자의 실력이 전공자를 능가하듯이 여러 분도 스님 못지않게 크게 깨닫고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
대부분 인도 사람들의 꿈은 자식들 결혼 시킨 후에 사문(승려)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 분은 사문은 아니지만 절에 다니고 선우회에 모이고 일상에서 부처님은 생각하고 있으니 그 또한 비전공자의 수행이다.
법당에서 피우는 향은 戒(계율), 定(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慧(지혜), 解脫(일체의 근심에서 벗어나는 것. 열반), 解脫知見 (해탈하여 일체의 참 모습을 꿰뚫어 보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수행 과정 순서이다. 계율을 잘 지키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지혜가 우러나오며, 지혜가 생기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마음이 편안하면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만약에 죄를 짓고 있으면서 향을 피운다면 그건 큰 죄다.
향을 피울 때는 업을 짓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열심히 계율을 지켜서 지혜로워지면 다음에 극락에 태어난다. 부지런히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음주를 하지 말고, 10惡을 짓지 말아야한다. 그래서 점점 깨달음을 얻으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무아와 불생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한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것을 열반이라 한다. 열반이란 불을 끈다는 뜻.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말한다. 죽어야만 열반하는 건 아니다. 열반에도 무여열반(無餘涅槃), 유여열반(有餘涅槃) 둘로 나눈다.
무여열반은 육신이 있는 상태에서 깨닫는 것, 유여열반은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 즉, 죽음 상태에서 열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열심히 수행하여 무여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는 깨달음을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상태라고 했다. 또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를 法身 報身 化身 세 가지로 나눴다. 법신은 부처님 가르침이고 보신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분이며, 화신은 법신이 몸으로 나타난 분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우리 모든 중생들은 화신이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 보살들은 보신이다.
비유하면 달은 법신이고 달빛은 보신이며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화신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와 같은 화신이므로 누구나 부처다. 나도 내 이웃도 자식도 다 부처로 공경하고 존중할 대상이다. 나에게 고통을 주고 비판하는 이도 다 내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부처다. 깨달으신 큰 스님의 무여열반도 화신이다. 도처에 우리의 부처가 있다. 그러니 남도 나와 똑 같이 대해야한다.
여러 분들은 이젠 시간이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많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수행하자. 깨달음에 관한 전공자인 스님들도 해탈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지만 목표만은 높이 잡고 노력하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우선 보시하고, 10악을 짓지 않기로 노력하기 바란다. 보시 중에 가장 큰 보시는 무외시(無畏施)다. 물질을 주는 게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남의 고통과 두려움, 근심을 덜어주어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이다. 타인도 누구나 부처이므로 항상 좋은 말, 부드러운 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보시다. 자비이타(慈悲利他), 남에게나 나에게나 모두 이로운 자비심을 갖자.
부처님 말씀은 의사의 처방과 같다. 처방을 잘 지키는 환자는 빨리 낫는다. 여러 분이 그 처방을 따르고 아니고는 자유지만 잘 지키고 수행 잘 하면 깨달음을 얻고 불생과 해탈의 경지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갈 수 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