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은 말복 땡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름 휴가 피크 타임에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시청이라는 트리플 악재가 겹친 탓으로 참석자들이 예상대로 적었다. 회원의 3분의 1만 만나는 날이 됐다.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하라는 배려로 법회는 평소보다 30분 단축했다. 날씨는 폭염이지만 오늘 법문으로 소나기를 흠뻑 맞은 듯 마음이 시원하고 무심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묘적 스님 법문은 스님 석사 학위 논문 내용인 중국 당나라 시대 황벽산에서 수행하신 希運 스님의 禪 사상에 관한 것.
희운 스님 선 사상의 주제는 항상 一心, 無心으로 살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一心, 無心이란 마음을 비우고 잡념을 갖지 않는 상태.
깨달음이란 복잡한 교리나 문자를 배우는 지식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항상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에서 온다고 강조하셨다.
스님은 오는 22일 (금) 동국대 법당에서 학위를 수여받고 가을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가신다. 올곧게 수행하시는 스님을 선지식으로 둔 행운은 과거 여러 생에 우리들이 선업을 닦은 좋은 과보라 여겨진다.
참석자 : 박광선 박상규 송인식 류진희 박미자 이향숙 정채영 7명.
묘적 스님 법문 - 희운 스님의 선 사상
내가 여러 분을 처음 만난 작년 8월부터 만 1년간 매달린 논문이 통과되어 학위를 받게 됐다. 마음으로 도와준 여러 분께 감사드린다.
당나라 때 황벽 희운 스님은 황벽산에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황벽 희운 스님이라고 통칭한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나라 불교 종파 중 최대 종파가 조계종이다. 조계종이란 말은 중국의 6대 祖師 혜능 대사가 조계산에서 수행했는데 우리나라가 혜능 대사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조계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희운 스님의 선사상을 제자인 혜능→임제 순으로 이어가면서 우리나라 조계종이 현재 채택하고 따르고 있는 ‘간화선’ 이란 참선법이 정립되었다.
희운 스님(? ~ 850년)은 중국 福州(현 복강성)출생으로 황벽산에서 수행했다. 그의 스승인 백장 스님은 “一日不作 一日不食하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식사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유명한 분이다. 이 말은 지금도 우리나라 스님들 사이에서 명심보감처럼 따르는 명언이다.
성철 스님의 유명한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성철 스님의 창작이 아니고 희운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부처님 생존 당시의 수행은 간단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공부하고 법문 듣고 식사는 매일 일곱 집을 돌며 걸식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열반 하신 후 남방(동남아)에서는 수행법이 복잡해졌다. 남방은 너무 덥기 때문에 게으르고, 문밖에 나가면 나무 열매가 지천이라 걸식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부처님 당시처럼 열심히 경전 공부를 하고 부처님 당시보다 수행법이 복잡해졌다. 이런 복잡한 수행법이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보다 간단해졌다. 나무 열매를 따먹는 無勞動은 안 되고, 걸식도 안 하고, 그래서 스님들 스스로 백장 스님 말처럼 직접 농사를 짓는 방법으로 자급자족했다.
중국의 불교는 경전이나 불법을 되새기고 공부하는 수행보다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禪으로 점차 바뀌었다. 달마대사에서부터 그 후 대사의 禪風을 잇는 6대 혜능스님까지 선 위주로 수행했다. 후에 이 선은 祖師禪이라고 불렀다.
한편에서는 경전과 부처님의 불법을 공부하는 수행이 병행됐다. 당나라 시대에 불교는 활짝 꽃피어 융성했고 왕실의 지지와 후원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당 말기에 국운이 쇠하면서 왕실이 몰락하고, 불교와 사찰은 핍박받았다. 사찰과 불상, 경전, 불교 관련 문서는 모두 태워지는 破佛이 자행되고 스님들은 죽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여기에서 오직 경전이나 사찰이 없어도 되는 禪僧들만 피신하여 불교를 이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희운 스님 당시에도 당연히 공부하는 敎宗보다 禪宗이 우세했다.
선은 경전 같은 글자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공부보다는 참선으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다.
희운 스님의 선사상은 一心과 無心이 중심이다. 스님을 찾아 수시로 법문을 듣던 고위 관리 배휴 거사가 스님 사후에 자신이 들은 법문을 기록한 책이 <傳心要法>이다. 이 책을 보면 희운 스님의 핵심 사상은 ‘心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것이다. 그는 금강경 구절을 인용해서 “我於燃燈佛所 無少法可得 (나는 연등불 처소에서 어떤 법도 들은 바 없다).”라고 했는데 모든 경전과 문자를 부정한다. " 이 순간이 다 수행이다."라고 한다. 마음이 편하려면 일심이 돼야하고, 일심이 되려면 무심이 돼야한다. 순간 순간에 깨닫는 하나의 마음이 일심이다. 일심은 경전과 문자 등 모든 걸 대변한다.
백장 스님의 스승인 마조 선사는 卽心是佛이라고 어감이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 이 말은 모두 마음이 곧 부처이고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것. 깨달은 마음이 一心이다.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한다고 희운 스님은 지적했다. 이것은 一心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 마음이 곧 부처인데 밖에서만 부처를 찾는다는 비판이다.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심이니 마음을 찾으면 부처이고, 그 본래 마음이 일심이라는 것이다. 일심은 佛性이라고도 표현된다.
일심이 되기 위한 수행법이 無心이다. 좌선할 때의 자세와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마음가짐에 초점을 맞춘 수행이다.
무심은 "모든 인연에 끌리지 않아 망상분별이 없고 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욕심과 성냄도 없고, 밉고 고움도 없으며 이김도 짐도 없다."
형식에 매달리고 敎法에 치우친 나머지 마음을 소홀히 하는 수행을 희운 스님은 비판했다. 무심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자유인, 無事人, 自在人 등으로 희운 스님은 지칭했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 자유자재한 마음의 경지가 무심이고 무심한 수행으로 일심에 도달한다는 것이 희운 스님의 핵심 사상이다. 이렇게 선을 통해서 무심→일심으로 깨달음에 이르면 항상 우리는 안심한 삶을 살 수 있다.
불법을 배우고 경전 공부를 하는 것은 지식을 얻자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만 목적이라면 나 같은 스님보다는 불교학과 교수에게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이 나를 찾는 것은 나도 그 일심, 무심을 향해 수행하는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팔정도 사성제 등의 교리보다는 일심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가는 수행자다. 일상사로 마음이 무거울 때 절을 찾고 불법을 배우는 것은 절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 밖을 나서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면 그건 수행이 아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절 밖에 있든 절에 있든 항상 같은 마음으로 편해지기 위해서다.
여러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을 다 결혼시켰고, 생의 여유를 누리고 있다. 선업을 쌓고, 악업을 짓지 않기 바란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마음이 항상 같지 않고 일상사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삶에서 물질은 중요하지만 물질이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 그걸 깨닫는 게 수행이다. 불교를 생활화하고 열심히 마음을 닦아 一心으로 돌아가도록 항상 마음을 다스리기 바란다. 실천하지 않으면 법문 공부는 의미가 없다.
회장님 오랜 기자생활만큼 부족한 법문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