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 그래도 탐진치(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곧게 수행하려는 11명이 모였다.
오늘은 부처님이 45년간 8만4천 가지 법을 설하신 내용을 기록한 경전의 성립 과정과 종류, 특징을 박미자로부터 배웠다. 불자라면 누구나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하고, 그 가르침을 익혀서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매번 모일 때 마지막에 하는 4홍서원(4가지 큰 맹세) 중 하나가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인데 바로 경전 공부가 이에 해당한다.
참석자 : 황정환 송인식 박광선 박영섭 이후영 박미자 박정애 정채영 정영숙 현정인 이향숙 11명
다음 달 모임은 10월 12일(금)당일 일정으로 수도권 사찰에서 사시 예불과 사찰 탐방을 갖기로 했다. 장소는 용인 와우정사로 잠정적으로 결정했다. 와우정사는 전 세계의 불상을 1천여 개 수집해놓았고 臥佛이 유명하다.
경전의 형성 과정
經典, 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이다. 경은 내용에 따라 三藏으로 구분한다. 삼장은 세 바구니라는 뜻인데 초기에 경전을 같은 것끼리 한 바구니에 담고 그 바구니가 세 개인 데서 붙은 이름이다.
삼장은 경장 (법문 내용), 율장(수행자가 꼭 지켜야할 계율). 논장(토론 , 논문) 의 셋으로 나뉜다.
결집(회의)
부처님 당시에는 아무도 설법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3개월이 지난 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서 부처님 제자인 마하가섭과 아난다, 우파리 등 5백 명의 아라한이 모여서 법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아난다가 기억했던 내용을 다른 제자들과 의논해서 수정해가며 기록한 최초의 경전이 아함경이다. 이 작업을 마가다국 아사세 왕이 후원했다. 아함경은 如是我聞(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여시아문은 그 후 지금까지 모든 경전의 첫 구절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행자들은 계율을 잘 지키지 않아 佛滅 후 100년이 지나서 계율의 수정을 위해 2차로 700 명의 비구들이 인도 서쪽 베살리에서 모여 10가지 계율(十事)를 조금씩 수정했다.
이후 문자로 기록한 것은 부처님 열반 후 약 3백년이 지난 BC 3세기경.
북인도 지역의 파탈리푸트라에서 고승 티샤 등 1천여 명이 모여 아쇼카 왕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이루었다.
불교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쇼카 왕은 고대 인도의 찬드라굽타 왕국의 왕인데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인도를 통일하였으나 전쟁으로 많은 인명을 해친 것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 발전과 포교에 적극적이었으며 왕국을 융성하게 만든 왕이다. 그는 동생을 스리랑카에 보내 부처님 진신 사리를 전하고 불교를 전파했고, 부처님 사리탑 8개를 헐어 그 속의 사리를 모두 꺼내 전 인도에 8만4천개의 사리탑을 세워 그 속에 나누어 봉안했다.
그 후 4차 결집은 2세기 경 카시미르 지역에서 쿠산 왕조의 카시니카 왕의 후원으로 모여 문자로 재정리함으로써 경전이 제 형태를 갖추게 됐다.
경전의 종류
경전은 초기에 만들어진 근본 경전과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대승경전 계열이 있다. 모든 경전은 한글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근본 불교 계열 경전 : 아함경, 법구경, 수타니파타, 대열반경, 자타카, 비유경 등. 아함경은 비교적 쉬운 말로 쓰인 최초의 경전인데 잡아함경 중아함경 등 5 종류가 있어 부피가 아주 크다. 법구경은 삶의 지혜를 詩적으로 적은 문학적인 경전이고, 수타니파타는 經의 모음이란 뜻이며, 대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 직전의 말씀(유언)을 적은 경전이고, 자타카는 부처님의 전생을 적은 경전이다.
대승불교 계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경장과 율장 경전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토론을 거쳐 앞서 말한 삼장 중 세 번째인 논장이 발달하게 됐다.
이후 1세기 쯤 지나 논장에 대한 비판과, 초기 불교의 변질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초기 불교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대승불교는 아함경을 토대로 한 부분씩 집중적으로 따로 기록하여 여러 가지 경전이 탄생했다. 오늘날 조계종의 소의 경전(근본 경전)인 금강경과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능가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육조단경 밀린다왕문경 원각경 등이 대승경전에 속한다. 이 경전들은 초기 경전과 같은 내용이지만 용어가 상당히 변한 것이 특징이다.
금강경에는 空이란 글자는 하나도 없지만 空사상을 역설하는 내용이고, 유마경은 유마거사가 적은 경전이며, 법화경은 연꽃이 더러운 곳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또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기듯이 수행으로 곧 깨달을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잇는 경전이다. 법화경은 태고종의 소의경전인데 이 경전에는 부처님을 大雄이라고 적은 부분이 있어, 이 호칭에서 따와서 오늘날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큰 법당을 대웅전이라고 부르게 됐다.
화엄경은 해인사 등 화엄종 사찰의 소의경전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구도의 길을 적은 경전이다.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무량수경은 아미타불과 부처님의 대담을 통해 아미타불의 공덕과 극락정토에 가는 방편을 설한 내용을 적은 경전으로 이 셋을 합쳐 정토삼부경이라고 부른다.
관무량수경의 성립에 얽힌 얘기 한 가지. 마가다국에 빔바사라 왕과 왕비 위제희가 있었는데 소생이 없어서 어느 도인에게 물었다. “어느 산에서 지금 도를 닦는 도인이 죽으면 너희 아들로 환생할 것이다.”
그 도인을 찾아 빨리 죽으라고 하니까 3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해서 왕은 사람을 시켜 도인을 죽였다. 도인은 아사세 왕자로 환생했으나 죽은 도인이 원한을 품고 환생한터라 어려서부터 반항적이었다. 그리고 부처님을 죽이고 수행자들의 長이 되고 싶은 제바달다의 꾐에 넘어가 아버지를 옥에 가둬 죽였다. 왕이 죽은 후 위제희 왕비는 삶에 대한 허무감과 괴로움을 못 이겨 부처님에게 괴로움을 덜어내는 법을 청하고 이때 설한 내용을 적은 경이 관무량수경이다.
아사세 왕은 후에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등을 달았는데 이것이 현재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다는 유래가 되었다.
육조단경은 경전 중 유일하게 중국 불교인들이 부처님이 아닌 고승의 법문을 기록한 경전이다.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불교를 전파한 후 그 법맥을 이어간 후계자를 祖師로 부르는데 그 6대 조사 혜능스님의 어록을 제자들이 적은 것으로 이 경전이 禪宗의 효시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추켜세우는 경전이고, 우리나라도 선종을 답습하는지라 이 육조단경을 부처님 법문을 적은 경전과 같은 급으로 중시하고 있다.
600년경의 혜능 스님에게는 에피소드가 무척 많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홀어머니와 어렵게 사는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시장에 갔다가 누군가 금강경의 한 구절인 “應無所住 以生己心(응당 머무는 곳이 없이 마음을 내라)”하는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달아 발심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나무를 해서 어머니의 생활비를 만들어놓고 출가하여 스님이 됐다. 그러나 너무 무식하여 밥 짓고 청소하고 나무를 해오는 부목을 살았다. 5대조사 홍인 대사는 신수대사를 일찌기 6대조사로 점찍어두었고 모두들 신수대사가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다가 조사로 결정하기 전에 테스트로 시를 지어 벽에 써놓도록 했는데 이 시에 밤사이에 누군가가 탁월한 답시를 적어놓았는데 이 禪詩는 바로 일자무식 부목인 혜능스님이 다른 사람을 시켜 대필시킨 시였다. 5대 홍인 조사는 이 시의 주인공인 혜능스님에게 그날 밤 조사의 상징인 발우와 가사장삼을 하사하면서 밤새 도망가라고 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신수대사의 일당을 피해 조계산으로 도망가서 참선 수행을 했으며, 그 산 이름을 따서 우리나라의 조계종이란 종파가 탄생했다.
당시에도 그를 무식하다고 조롱하고, 시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혜능 스님은 이렇게 그들의 공격을 잠재웠다. “달을 쳐다보는데 달만 보면 되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냐.”
밀린다왕문경은 그리스 총독인 밀린다가 인도의 어느 지역을 점령하고 왕인 된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마가세나 스님과 불법에 관해 대담한 내용을 적은 경전이다.
원각경은 부처님과 12 보살과의 문답을 적은 경전이다. 경은 이처럼 수없이 많지만 여러 큰 스님들이 쉽게 번역한 것이 많으므로 한 두 권 자기에게 맞는 것을 골라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쉽게 풀어서 적어주신 노고에 감사드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