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둘째 목요일 오후 6시로 정기 모임 시간을 변경한 후 첫 모임이다.
오랜만에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는 모임이었다. 불교는 “믿으면 극락 간다.”는 기복 종교가 아니라 심지어 벌레까지도 모든 중생이 부처이므로 내 안의 불성을 닦고 찾아가는 수행의 종교이다. 이런 까닭에 스님을 통해 부처님 말씀을 한 가지씩 배우고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보다 지혜로워질 수 있다.
오늘은 이사 가는 사람, 지리산 등산한 사람 등등 사정으로 불참자가 많았지만 스님의 우렁찬 목소리의 예불과 법문이 법당을 충만케 했다.
법사로 모신 스님은 보찬 스님(화계사). 참선 공부를 위주로 수행하는 스님이라 체격이 장대함에도 불구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데에 몹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셨지만 법문 내용이 아주 알차서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모시자는 회원이 많았다.
법회 후 며칠 전 차남 혼사를 치른 홍사순이 한정식을 쏘았다. 공양중에도 수줍음을 버린 스님으로 인해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박정애는 스님 세속 나이가 큰 아들과 동갑이라고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는데, 그 스님 생전 처음 잡아 본 여자 손일 듯 싵다. 동기 모임이라 들었는데 이정애는 몇년 후배냐고... ㅎㅎㅎㅎ
참석자 : 송인식 류진희 박미자 박정애 이정애 이향숙 이후영 홍사순 현정인
법문 : 보찬 스님
먼저 내 소개를 하자면 중학교 때까지 몹시 내성적이고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교에 진학 한 후부터 열심히 친구들과 어울려서 외향적으로 좀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내성적이고 그 후 친구들을 만나면 활발해진다. 지금도 몹시 긴장된다.
한 때 나는 키가 좀 더 크고, 비만한 체격이 지금보다 가늘기를 바랐다. 그러나 참선을 하면서 그 바램이 없어졌다. 키가 더 커지고 싶다든가, 날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버리면 고통이나 괴로움은 사라진다.
수행은 여러 가지 방편이 있다. 呪行(주문을 외우는 것)은 심오한 뜻을 지닌 다라니(주문)을 열심히 반복해서 외우는 수행인데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한다.
또 看經(경전을 읽는 것) 수행도 있다. 간경은 그저 형식적으로 읽는 게 아니라 눈으로 읽으면서 머리로는 뜻을 생각하는 읽기법이다. 불교 경전을 열심히 매일 읽고 뜻을 배우는 수행법도 주행 못지않은 공덕이 생긴다.
수행자들이나 불자라면 6바라밀을 지켜야하는 데 그 중 으뜸이 布施이다.
보시에도 財布施, 法布施 無畏施가 있다.
전에 어느 스님께서는 재보시만 강조하셨다고 하는데 내 사견으로도 재보시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재보시는 글자 그대로 재물, 돈을 남에게 베푸는 행위다. 왜 재보시가 중요한가. 돈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다. 돈을 준다는 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남에게 무상으로 준다는 의미이다. 그저 물질이 아니라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에서 재보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공덕도 그만큼 크다.
법보시는 불법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조계종의 소의경전(근본이 되는 경전)은 금강경인데 금강경은 법보시의 공덕이 가장 크고 무량하다고 한다. 경을 수지독송(몸에 지니고 늘 읽는 것)하고 그 내용을 남에게 전달하면 그 복이 항하사 모래 만큼 많은 보물을 남에게 보시한 공덕보다 크다고 씌어있다.
무외보시는 남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마음을 편안하게해주는 것이다.
내 경우를 보면 눈썹이 굵고 얼굴이 크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주위에서 무섭다고 느꼈다. 그러니 화가 날 때는 더 무서워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언제부턴가 늘 웃는 표정을 지었다.
무외시란 이처럼 나로 인해 남의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또 마음이 불편한 사람에게 나의 위로의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그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시는 꼭 재물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으로, 말로서 얼마든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 큰 보시가 된다.
그러나 보시에는 세 가지 원칙, 3輪 淸淨의 원칙이 지켜져야 참다운 보시다.
세 가지, 베푸는 주체, 받는 주체, 전달되는 것이 모두 청정해야한다.
베푸는 사람은 베푼다는 생각이 없어야하고, 받는 사람도 받는다는 생각, 부담이 없어야한다. 전달되는 것 또한 청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건강이 안 좋은 사람한테 술 대접을 한다면 좋은 의미로 대접한다 해도 받는 이에겐 부담을 주므로 그 술은 청정하지 못하며, 이것은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훔친 물건을 남에게 보시한다면 그건 역시 청정한 보시가 아니다.
3륜 청정의 보시라야 해탈에 이르는 보시가 된다.
보시는 그 양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관건이다. 부처님 시대에 한 가난한 할머니가 부처님에게 등불을 밝히는 기름을 주었다는 <빈자의 등불>얘기가 있다. 가난한 할머니는 등불에 쓸 기름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털었다. 한 편 부자들도 더 큰 등불을 마련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가난한 노파의 등불을 소중히 생각하시고 축복을 주셨다. 보시란 이런 것, 온 마음을 다해서 바치는 것이다.
방금 어느 보살이 질문하신 것처럼,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냈는데 접수 기관에서 받는 주체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착복했다면, 내 개인 의견으로는 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할 때에도 지혜가 따라야한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는 두 수레바퀴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 시대에는 길이 험해서 손바닥 만한 길에는 한 바퀴 수레가 다녔고 넓은 길에는 두 바퀴 수레가 다녔다. 네 바퀴 수레는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수레의 두 바퀴라는 건 하나가 없으면 쓰러진다는, 서로 공존해야만 수레가 간다는 의미이다. 보시에도 자비심과 지혜가 함께 어울려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님이건, 재가불자건 모두 자기 속에 있는 불성을 닦아 성불하기를 원한다. 불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동물, 개에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성불하는 것도 아니고 성불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성불이 산의 頂上이라면 우리는 등산하면서 반드시 정상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된다. 나도 어느 겨울에 등산을 하는데 새벽에 너무 추워서 세 번이나 포기한 적이 있다. 등산한다고 다 성공하지 않는 것처럼, 수행한다고 다 성불하는 것도 아님을 알면 걱정이 안 생긴다.
등산 길에는 험한 곳도 있고 변수가 많지만 꾸준히 열심히 올라가는 과정이 좋으면 좋은 것이다. 중요한 건 정상 정복이 아니라 오르는 과정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