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선업(장점)과 불선업(단점)의 비율이 5대 1이 정상이다.
경전에 적힌 내용 한 토막. 어느 곳에 주민들 성격이 사납고 잘 다투는 마을이 있었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가서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번번이 망신만 당하고 실패. 그러자 한 스님이 다녀왔는데 이후 웬일인지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었다. 먼저 실패한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주민들 왈 “부처님 제자라는 그 스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장점을 칭찬해주었다. 그 사람 장점만 다른 사람에게도 말해주니 나중엔 모든 사람이 기쁘고 행복해졌다.”고 했다.
언젠가 왕모기가 스님의 허벅지를 물자 차마 죽일 수 없어 다리에 힘을 꽉 주기를 세 번 하셨다. 모기는 그만 힘이 주어진 허벅지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버둥대는 것을 살짝 잡아 바닥에 놓았다. 모기는 결국 비실비실 쓰러졌다. 그 후 물린 자리가 가렵다가 점점 가려운 곳이 넓어졌고, 계속 응시하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을 쓰면서 보면 가렵고, 신경 안 쓰면 가렵지 않더라.“는 것. 모든 것은 마음에서 온다. 처음엔 가렵지만 물렸다는 생각을 잊으니 시원하다. 가렵다고 마음을 자꾸 쓰면서 긁었다면 아픔은 더 커졌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고통 괴로움도 처음엔 아프지만 나중엔 마음 먹기 따라 시원해집니다.”
또 모기가 아닌 해충이나 쥐는 죽여야한다고 생각하나 해롭다는 기준은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입장일 뿐이다. 해충이라고 다 죽이고, 쥐를 다 죽인다면 생태계 질서가 파괴된다. 인간에 이익을 준다는 나무는 어떤가. 낮에는 산소를 주지만 밤엔 탄산가스를 내뿜는 해를 끼친다. 호주에서는 쇠고기 생산을 늘리려고 소의 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는데 그 소들이 방귀로 뿜어내는 메탄가스 양이 폭증하여 대기의 오존층을 파괴한다고 한다. 어떤 행위든 다수에 이익을 주는 쪽으로 기준이 정해져야 한다. 해충이라도 의도적으로 죽이면 죄이고, 무의식적으로 죽이면 업보를 받지 않는다.
극락과 지옥은 어디 있나? 지금 배가 아파서 고통스러우면 지옥이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면 극락이다.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Now & here.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마음이 있다. 움직일 때는 그곳이 마음 자리다.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 마음을 두라. 과거에 집착 말고, 여기 있으면서 딴 데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자리만을 생각하고 살아야한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상대의 지금 이 순간 잘못만 생각하지 않고, 과거 어느 때 잘못, 그것도 그 잘못이 아니라 그때의 화났던 감정을 지금에 보태서 화를 더 내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게 화가 나도 지금 이 순간의 잘못만 생각하자.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졌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분이다. 우리가 부처인데 왜 우리는 괴로운가? 본래는 부처지만 실제 行이 부처의 행동과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고통은 감정, 몸, 욕구, 생각에서 온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갭을 메우려는 욕구가 고통을 낳는다.
우리는 순간순간 벌어지는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려야한다. 욕구가 나쁜 방향으로 가면 苦集(집착과 괴로움)이고, 좋은 방향으로 가면 滅道(고를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이 마음이 변하는 방향을 알아차리면 고통은 해결된다. 알아차리는 것을 念定이라 한다. 念자를 보면 지금이라는 今밑에 마음 心을 합친 것, 즉 지금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의미다. 지금의 내 고통이 욕구불만의 고통임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내가 이 상처를 안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나아진다. 순간순간 마음 속에 벌어지는 변화를 알아차리고 “이 욕구는 내가 증폭시킬 뿐이므로 욕구가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念定으로 인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깨달은 것을 念定慧라고 한다.
상대방으로 인해 생긴 마음, 열 받는 마음도 무엇인지 알아차리면 지혜가 생긴다. 그 마음을 알려면 마음을 비우는 放下着을 해야 한다. 단단한 벽에 물총을 쏘면 물이 들어가나? 방하착으로 내 머리가 스펀지가 돼야 물총을 쏘면 물을 빨아들이지.
내 안에 부처가 있으니 부처의 행동을 해야겠다면 겸손하게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하고,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붙잡아야할 것은 念定慧이다.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마음을 바로 찾아 알아차리기를 꾸준히 하면 道에 이른다.
어떻게 하면 부처다운 行인가를 생각하면 내가 변한다. 내가 변하면 가족도 변한다. 念定을 잘 해서 감정 조절을 해야 한다. 지금 아픈데 계속 아플 건가, 시원해지고 싶은가를 꾸준히 念定해서 번뇌를 끊자. 본래의 내가 부처인데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꾸준히 생각하자.
반야심경에 受 想 行 識(감정, 생각, 행동, 의식)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의 모든 언행을 구분한 건데, 여기서 受를 보자. 그것은 즐거울 樂일 수도 있고, 苦일 수도 있다. 고는 왜 오나. 탐욕 때문이다. 탐욕 Want 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갭을 메우고자 하는 욕심에서 온다. 욕구 Need는 먹고 싶고, 화장실 가고 싶은 감정이다. 문제는 탐욕에 있다. 탐욕이 지나치면 성이 나서 瞋(진: 화를 냄)이 된다. 진은 5단계로 변한다. 짜증→ 분노→ 분개→증오→ 적개심으로 강도가 변한다. 분개 단계에서 그대로 억압하면 화병이 생긴다. 적개심 단계에 이르면 상대를 없애고 싶어진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자. 연애 감정을 길어야 3년이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두 번째 만난 상대와 결혼하면 그 기간을 더 짧다. 사람이 육신만 있고, 혼이 없으면 시체, 혼만 있고 육신이 없으면 귀신이라 한다. 헤어진 첫사랑 때문에 첫사랑 귀신을 잡고 살면서 두 번째 상대를 그 귀신과 비교하면서 사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첫 만남의 애정은 금세 사라지고 3년이 못 가다가 아이를 낳으면 그럭저럭 현상유지를 한다. 그러다가 자식들 다 결혼시켜 내보내면 어차피 이젠 헤어질 수 없으니 정이 돈독해져서 부부동반 해외여행이다 취미생활이다 하고 어울린다.
그러다 아내가 먼저 죽으면 남편은 3년 내에 죽고,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는 타고난 수명보다 10년을 더 산다고 한다. 왜냐? 남편은 평생 아내에게 종속당하고 살기 때문에 의지처가 없어지면 스트레스 받고, 아내는 평생 달고 다닌 <거룩한 혹>을 떼버린 탓에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
부부 사이란 이런 것이니 욕구불만이 있어도 마음을 잘 알아차리자. 부부간에도 화가 날 때 이때 樂으로 바꾸는 방법이 念定慧이다. 알아차리면 고통과 죄의 근원인 貪瞋痴(욕심 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사슬에서 벗어난다. 이 셋은 삼각형 사슬이라 돌고 돈다.
인생은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봉우리의 연속이다. 사람마다 그 봉우리에서 서있는 지점이 다르다. 끝까지 가는 이도 있고, 중도에 쉬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이상의 고지까지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럼에도 이상적인 고지에 도달하지 못해서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다. 이상에 도달 못하는 게 인생임을 안다면 행복해진다. 그러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왜 나는 불행한가? 내 인생은 밑바닥이라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보너스로 받은 게 많음을 알아차려야한다. 최악의 상태라고 믿는 사람도 건강 등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받은 보너스는 얼마든지 있다. 그럴 때 念定慧를 하면 뭐가 속 터지나? 인생이란 것부터가 보너스인데... 고통 번뇌는 나를 일깨우는 경계라고 믿자. 아무리 힘들어도 본전은 있는 법. 행불행은 보너스 양의 차이일 뿐. 그것을 알아 생각이 바뀌면 기분이 바뀐다. 기분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기분 생각이 바뀌면 번뇌 고통은 다 사라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생각을 바꾸면 고는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병이나 번뇌는 모두 마음에 따라 행복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