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에는 연분홍 매화 꽃 망울이 터졌다는 산뜻한 花信을 접한 25일, 선우회 세 번째 모임에도 상큼한 훈풍이 불었다.
경전에는 예전에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 이마에서 5색의 찬란한 빛, 호상광이 나왔다고 하는데 스님과 내가 법당에 들어서니 조용히 정좌한 19명의 눈이 호상광을 발하듯 맑은 빛으로 맞아주어 내 심장이 그 빛에 데이는 줄 알았다. 신입 회원인 윤상진 김광현과 게스트 이명희, 13회 선배 3분까지 참여했으니 꽃망울이 살포시 터진 게 아니라 만개한 이 기쁨에 그저 모든 회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발족 3개월 만에 이 만큼 많이 회원이 참여한 소모임이 선우회 말고 16회에 또 있는지? 그 분야의 스승을 초빙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소모임이 또 있는지? 이 질문에 선우회는 행복한 2관왕이다. 맞지? 그래서 선우회 모임이 있는 한 주는 내내 행복해진다.
우리가 지난 60년간 어느 하루라도 오늘처럼 두 시간 동안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서 숨소리도 죽이고 스승의 말을 경청하며 진지하게 공부한 일이 있을까? 그렇게 부고를 다녔다면 한국 역사가 달라졌을 터. 이제라도 남은 생을 우등생으로 30년만 살자.
반포 관심사 주지 태범 스님의 인도로 법회는 시작하여 일반 사찰의 의식대로 기도, 법문, 축원 순으로 진행. 축원에서는 모든 회원들 이름을 거론하며 각자 심중 소망을 성취하도록 축원해주셨다.
늘봄공원 한식당에서 공양 후 정기 모임을 부득이 둘째 토요일로 날짜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동참자 : 김광현 김두경 박상규 박영섭 송인식 윤상진 이원구 황정환 박미자 박정애 유진희 이영자 이향숙 이후영 정영숙 홍사순 외 게스트로 이명희와 13회 선배님 3명등 20명. 천주교 신자인 이명희는 이날 법문이 너무 좋았다며, 준 회원으로 스님 법회날에는 참가하기로 약속했고, 이재상 민일홍도 참가 의사가 있음을 표해 다음부터는 더욱 활성화될 조짐이다.
태범스님(관심사 주지)의 법문:
주제; 변화 (제행무상)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환경도 우리의 몸도 변한다. 어느 대학에서 개구리로 실험했다. 비커에 알코올을 담고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했다. 알코올이 미지근할 때까지 개구리는
즐기면서 수영을 했다. 그러다 뜨거워진 다음에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어 결국 죽고 말았다. 알코올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변화에 개구리가 대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느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변화란 이처럼 금방 오는 게 아니라 서서히 오는 동안 우리는 느끼지 못하다가 뒤늦게 갑자기 느끼기 때문에 적응을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변화에 대비해야하는 게 불교적 삶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三法印을 깨달으면 대비, 적응할 수 있다.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 가지를 말한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 변한다는 의미인데 허무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동차 부품은 1만 6천개이고, 제트여객기 부품은 3백만 개, 우주왕복선 부품은 5백만 개, 그러나 인간의 몸은 1백조의 세포로 구성돼있고 혀에만 9천개의 맛을 느끼는 세포가 있다 한다. 이 천문학적 숫자의 세포가 1초 동안 3백만 개가 소멸되고 생성된다. 그래서 7년이면 1백조의 세포가 완전히 뒤바뀐다. 이것이 변화이고 제행무상이니 허무와는 별개의 개념이다.
제행무상이니 본래의 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없는 것이다. 바로 제법 무아이다. 가령 내 이름이 철수라고하자. 5살 때도 나는 철수였고 10년 전에도 철수이고 지금도 철수지만 5세 때와 10년 전과 지금의 나는 전혀 모습이 다르다. 그렇다면 본래의 참 나는 무엇인가.
모든 건 변하기 때문에 본래의 나는 없는 것이다. 변치 않고 있는 건 이름 뿐이다.
일체개고는 무엇인가. “나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에너지”가 苦이다. 고는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 마지막 공양하신 음식이 우유로 만든, 지금의 요구르트 같은 것이다. 요구르트의 원료는 우유이고, 우유가 因이며 변화라는 因緣을 거쳐 果로서 요구르트로 변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결과가 따른다는 <연기법 또는 인연법>이 부처님이 제일 처음 깨달으신 법칙이다.
연기법칙이란 첫째가 인과율. 모든 것은 내가 지은 업을 따라 생긴 결과이며, 업장은 수행을 통해서만 없앨 수 있다. 둘째는 인연화. 모든 것은 인연으로 변한다는 것. 예를 들어 팥이 설탕과 만나면 양갱이가 되고, 밀가루와 만나면 빵으로 변하듯, 모든 것은 인연에 얽혀 변한다. ·
셋째는 상관성. 모든 것은 각자 모양을 갖고 있지만 따로가 아니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不二, 둘이 아니라 하나로 맺어있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우주와 나는 하나이고, 모든 중생과 나는 하나이고, 물과 나도 하나이다. 여기 컵의 물은 따로 보면 물이지만 내가 마시면 몸의 일부인 나가 된다. 그러므로 물과 나는 하나이다.
모든 인연은 이렇듯 하나이니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한다. 여러분이 고교 동문들이란 특별한 인연인 줄 알고 있는데 그 인연은 5백생을 거듭하는 동안 맺어진 인연의 결과이니 그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선업을 많이 지으면 극락 간다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현재의 인연을 중시하기 바란다. 주변의 인연들에게 늘 즐겁게 미소 짓고 살아야한다.
불치라고 선고 받은 암환자도 낫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곧 무상이고, 불교적 삶이다. 이처럼 변화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고, 변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苦도 괴로움이 아니라 희망이고 즐거움이다. 괴로움도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괴로움이나 악은 없슴을 안다면, 또 그 괴로움이 변할 줄을 믿는다면 그건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며 희망이 된다.
불교의 핵심은 한 글자로 空이다. 그러나 無와는 전혀 다른 뜻이다. 법정 스님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텅빈 충만이라는 의미이며,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가령 여기 책상은 작고 또 작게 자르다보면 미세한 먼지들이 되는데 이 먼지는 책상이 아니다.
이외수의 소설<칼>(1982년)을 보면 숲속을 산책할 때 풀잎의 이슬 속에 아파트가 보이고 모든 사물이 보인다는 글이 있다. 불교의 법성게에도 일미진중함시방, 작은 먼지 속에 이 세계가 있다는 귀절이 있다. 부처님은 처처에 안 계신 곳이 없으며, 지금은 단말기 하나로 영화도 보고 통신도 하고, 정보도 얻는 <유비쿼터스>시대인데 이것이 모두 空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지만 충만해 있는 것, 이게 텅빈 충만이다.
무상함과 苦는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는 진리이다.
불법이란 독약과 같다. 지키기가 독약 먹는 것처럼 쉽지 않고, 그러나 지키면 독약이 때로 약이 되듯 그 기쁨은 어떤 희열보다 큰 法悅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는 질량의 제곱이라 했는데, 이 법칙을 불교에 대응시키면 에너지는 기도의 힘이고, 질량은 성취라고 생각한다. 곧 간절한 願을 세우고 기도하면 에너지가 모여 핵폭발의 힘을 내고, 따라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기도해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모든 것은 제행무상하여 변화하므로 반드시 언젠가는 이뤄진다고 확신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살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성불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