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에 청계산 옥녀를 만나는 매화당 마님들이 10월의 마지막 주, 1박 2일로 깜찍한 여행을 했다.
이 세상에 오직 우리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인적 없고 광활한 원주의 오크밸리 콘도에서.
27일 오후 3시. 올림픽 아파트에서 김양자와 남영애 차에 각각 4명씩 타고 출발.
산뜻한 맵시로 단장하고 나선 마님들은 강인자 김양자 남영애 박정애 유미희 이향숙 정숙자 정영경. 당수 박미자는 아직 두바이에 체류 중이고, 진영애는 전 주에 시모상을 당했고, 사업으로 바쁜 전행선이 아쉽게도 대열에 끼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원족 가는 듯이 마음이 한껏 풍선처럼 부풀었다. 여학생끼리 얼마 만에 가보는 행락길인가.
평소에 손주 돌보느라고 바쁜 양자와 영애, 어머니 간병으로 바쁜 박정애, 벨기에의 딸네 집에 가있다가 최근 귀국한 유미희 등 저마다 바쁜 일정을 모두 쉬고 어렵게 짬을 냈다.
강원도로 들어서면서 풍경이 싹 달라진다. 초록의 거리가 오색 창연한 컬러로 서서히 오버랩 되다가 오크밸리 입구부터는 거의 절정에 이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프장 대평원에 울긋불긋 나무들이 반긴다.
차에서 내리자 먼지 하나 없는 듯 청명한 하늘에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강인자가 안내한 이 곳 4층 객실에서 3개의 방에 나누어 짐을 내리고 내려다본 전망은 그야말로 별천지. 적당히 높은 구릉이지만 끝이 안 보이는 대평원 같은데 골프장 잔디도 노르스름한 게 시야가 온통 한 폭의 유화다.
액자 속의 좋은 그림을 감상해도 엔돌핀이 솟는다는데 자연이 연출하는 무한대의 그림을 보노라니 엔돌핀 솟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평선 끝까지 탁트인 전망을 잠시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식탁위에 준비한 먹거리들을 풀어놓는데 장난이 아니다.
음식 솜씨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자는 쇠고기를 무려 5Kg이나 양념에 재오고 숯불구이 바비큐까지 꺼내 베란다에 놓는다. 양자와 쌍벽을 이루는 영애도 황태구이를 위해 양념해온 황태 5마리를 꺼낸다.
이 두 주역은 이것들 외에 갖은 밑반찬과 과일, 커피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운전과 준비에 수고한 두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거기에 미희가 준비한 와인 한 병과 벨기에 산 치즈, 이향숙이 준비한, 고창에서 직송한 복분자주, 다른 친구들이 준비한 간식까지 다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베란다에서 열심히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냄새에 회가 동하고, 영애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과 황태구이를 한다. 나머지 친구들은 반찬들을 그릇에 담고 정리하면서 눈과 손이 모두 분주하다.
진수성찬을 이룬 가운데 숯불구이는 입에서 글자 그대로 살살 녹고 황태구이도 끝내준다. 복분자주로 매화당의 발전을 빌며 건배하고, 매년 한 두 번씩 이런 모임을 갖자고 이구동성이다.
우리는 모두 食神처럼, 餓鬼처럼 서로 먼저 집으며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평소보다 두 배 씩은 먹은 것 같다. 이날의 인기 메뉴는 단연 숯불구이와 황태구이, 매실 장아찌. 과일과 커피로 마무리한 후 설거지 팀, 싱크대로 그릇을 나르는 팀 등 각자 척척 분담해서 순식간에 식사를 마쳤다.
6시경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서 저녁 산책은 포기했다.
이제부터는 대화의 시간. 먼저 양자에게서 쇠고기를 맛있게 양념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영애에게서는 황태구이 양념법을 진지하게 들었다.
쇠고기는 양념을 물 2: 간장 1 : 설탕 1.5~2의 비율로 섞어서 잘 저은 후 넣고 여기에 후추가루와 마늘. 파를 썰어 넣고 무친다는 것이다. 보통 주부들은 물을 넣지 않는데 물을 넣어야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는 것.
황태구이는 황태 북어를 껍질을 벗기고 물에 살짝 적셨다가 꼭 짠 후 토막 쳐서 갖은 양념으로 버무렸다가 굽는다.
먹고 남은 숯불구이는 그대로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 날 식은 후 먹어도 별미라고 냉동칸에 넣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귀한 비법을 이론으로 실기로 배운 시간이었다.
요리 강의 후에는 자유 대담이지만 최근 경제 문제 등 나라 걱정과 내년 45주년 행사에 대한 희망사항, 종교 얘기로 시작하다가 화제를 180도로 바꿨다. 언제 어디서나 들어도 물리지 않는 영원한 동서고금의 화두는 바로 사랑 이야기 아닌지. 그래서 각자의 가슴 아린 첫 사랑 이야기와 그 반대의 상큼한 연애담을 돌아가며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애틋하게 그리운 추억담으로 들려줬다.
여러 가지 배꼽 잡는 연애담이 많았으나 우리를 모두 쓰러져 배를 잡게 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만 보면....
“나는 데이트를 주로 산으로 갔어. 한적한 곳에서 키스를 하는데 둘 다 처음이라 뭘 알아야지. 그냥 무조건 열심히 오래 했지.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입술이 퍼렇게 멍들고 부르트고 부어올라 난리도 아닌 거야. 그런대도 우리 엄마는 상상조차 못하고 어디 부딪친 줄 알더라구.”
“나는 첫 키스를 하려고 무드를 잡았는데 안경이 땅으로 떨어져서 분위기를 망쳤지.”
친구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벼처럼 옆으로 쓰러지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 중에도 가장 웃긴 그랑프리감은
남친과 궁합을 보러 갔는데 역술인 말이 “ 당장 오늘 그 남자를 자빠트려. 천생연분이니까 놓치지 말라구.”라고 했다.
“그 사람은 그런 맘이 전혀 없는데요.”
“그 남자는 소심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라 당신이 자빠트려주기를 속으로 기다린다니까. 그 남자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인연이라구.”
“우아- 하하하 “
이 대목에서 모두들 옆으로 앞으로 쓰러지고 바닥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야, 이거 오늘의 백미다. 하하하하.“
이 주인공이 누군지는 여기서는 절대 비공개이니 알려 하지 말자.
너무 웃어서 싫컷 먹은 저녁 식사가 금세 소화가 되어 배가 고파질 지경이었다.
새벽 세시까지 우리는 여한 없이 먹고 마시고 웃다가 그제야 잠을 청했다.
28일 화요일. 드디어 오크밸리의 찬란한 날이 밝았다. 양자가 준비해온 해남 고구마를 구워서 한 개씩 우유와 함께 간단히 요기했다. 속이 노랗게 익은 고구마도 아주 달다.
9시. 우리는 산을 사랑하는 매화당답게 가벼운 산행에 나섰다.
뒷산 오솔길을 두껍게 깔린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일렬종대로 올라갔다. 인자는 이곳에서 묵고 골프를 친 적은 많지만 산행은 처음이라면서도 익숙하게 선두에서 안내했다.
제법 가파른 곳이 있어 줄을 잡고 오르거나 내렸지만 우리들은 이 산을 통째로 전세 낸 듯 오붓하게 걸었다. 어제 밤 웃기던 대화를 리바이벌하며 또 폭소를 터뜨리고, 서로 조심하라고 다독여 주고, 무엇보다 코끝에 닿는 달콤한 공기와 세상을 굽어보는 듯한 느낌으로 걷다가 어느 새 원점에 닿았다. 산행 시간은 1시간 반.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다. 남았던 숯불구이는 양자의 말대로 차갑게 먹었는데 마치 쇠고기 통조림 맛 같기도 한 별미여서 역시 식신처럼 금세 동났다. 약간의 고기를 섞어 끓인 김치찌개는 아침의 최고 메뉴. 운동 후 먹는 식사인 탓인지 상위의 반찬과 큰 냄비에 가득한 김치찌개를 몽땅 깨끗이 비웠다.
정오가 되자 우리는 체크아웃 하고 서운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 스케쥴은 양평의 근사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자는 것.
횡성을 지나 양평 쪽으로 가는데 용문 방향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문득 영경이가 용문의 정정광 집에 갈까? 하는 즉석 제안을 하고 모두가 OK 사인을 보낸다. 그 이정표에서 용문사 방향으로 가는 길은 샛노란 세상이 펼쳐져 있다. 길 양 옆의 은행나무가 100 % 샛노란 옷을 입고 노랗고 긴 터널을 이루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십리길은 될법한 은행나무 터널 끝에 정광이네 부부의 집이 나타났다. 한 달 전 넘어져서 다리에 골절상을 당한 정광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고, 송정섭은 밭에서 일하는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예정에 없던 일로 친구를 맞으니 그 반가움은 몇 배가 되고 우리는 정광이를 차례로 안았다.
정광이 부부가 수확한 사과와 배, 포도가 한 아름 상에 나오는데 그 껍질 채 먹는 사과 맛이 시중에는 찾기 어려운 꿀맛이다.
과일을 포식하고, 정광이가 직접 만든 국화차를 마시니 가을 국화향이 고스란히 입안에 퍼진다. 가을을 느끼고 맛 보고 어제 오늘 우리들은 가을 여자다. 양평 카페에 간 것보다 백번 잘 왔다.
정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웰빙 된장 고추장. 이 기회에 살림꾼인 우리 회원들은 모두 이 무공해 장들을 샀다. 덤으로 살찐 무와 파를 보너스로 듬뿍 받았다. 며칠 전에 유명 메이커의 시판 고추장이 중국산 양념으로 범벅되어 만들어졌다는 뉴스가 있던 참에 너나없이 가족들 건강을 챙기는 살뜰함이 묻어나는 현지 쇼핑이다.
정광이와 서로 손을 흔들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서울로 방향을 돌렸다.
그렇게 1박 2일 동안의 나들이는 웃음과 식도락과 우정을 만끽한 올 가을의 최고 이벤트로 끝났다. 유감스럽게도 사진 한 장 못 찍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머리 속에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영상을 가득 인화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