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년 전 뉴질랜드에 이민와서 크라이스트처치에 거주하고 있던 김기환 동문의 별세 소식을 이렇게 1년 반이나
지난 지금 알리게 되어 많이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알게되어 망설이던 중, 마침 고 김기환 동문의 아들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게 되었고, 딸(미국거주)을 만나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짧았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던 고 김기환 동문을 추모하며 여러 친구들에게 소식 알리며, 딸의 편지를 통해 그 삶을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께,
어머니 그곳은 편안하신가요?
항상 엄마! 라고 부르던 어리광쟁이가 이제와서 어머니라고 불러봐요.
제 나이도 벌써 스믈일곱, 살아계실 적 의젓하게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 것이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요.
재작년 9월에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저는 어린애처럼 어리광 부리고, 짜증을 내기도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많이 울었습니다.
언제나 제 곁에 계셔주실 거라고 믿었기에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버팀목, 어머니가 이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힘들었어요. 이루 말 할수 없는 슬픔에 눈물만 계속 흘렸지요.
그런데 얼마 전 이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매주 토요일마다 함께 등산을 하던 모임 기억하시지요?
그 키위(뉴질랜드 인)친구들 중 한분이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함께 간 저에게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니? 너의 어머니가 항상 지켜봐주시는 거 알고있지?" 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였지요.
그러나 사실은 어머니 생전에 부리던 어리광을 돌아가신 후에도 부리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그저 아이처럼 울기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는 생전의 어머니를 회고하며 남겨주신 가르침과 추억으로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버팀목을 쌓으려고 해요.
어머니는 지금의 제 나이에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비싼 소갈비 공세에 결혼해, 오빠를 낳으셨다고 하셨지요.
4남2녀의 장녀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묵묵히 감당하셨던 어머니는 아내로서도,어머니로서도 늘 묵묵히 인내하고
희생하며 살아 주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은, 돌아가신 후에도 항상 원하시던 장기기증으로 이어졌지요. 어머니의 장기가 여러명의 환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는 뉴질랜드 장기 기증협회의 편지를 읽으며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렸답니다.
1996년 아버지 정년 퇴직후 뉴질랜드로, 온 가족이 이민을 막 왔을때가 생각납니다.
영어라는 생판 다른 말을 하는 이국 생활이 적응키 힘들었을 수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침착함과 인내심에서 배어나오는 탁월한 듣기 실력에, 아버지의 거침없는 말하기 실력이 더해저 우리 가족의 뉴질랜드 생활이 꽤 순탄하게시작할 수 있었지요. 따뜻하고 친절하셨던 어머니, 언제나 바르고 옳은 말씀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셨던 어머니.
어느 상황에나 맞아 떨어지던 그 지혜로운 생각과 논리를 왜 오빠와 저는 철없이 흘려듣곤 했었는지....
참 오빠는 작년 12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새 언니는 요리를 참 잘해서 유난히도 맛있던 어머니의 식혜 맛을 비슷하게 냅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설마 자신이 그렇게 가실 줄모르고 추석이라 손수 만들어 놓으셨던
식혜를 오빠와 밥알까지 긁어먹으며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참 빨리도 갑니다.
시간을 쪼개어 아껴 쓰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꺼내 봅니다. 누가 보아도 탄성이 나올 만큼 멋진 필체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제게 격려의 편지를 써 주시곤 하셨죠.
내 자신은 내가 주인. 사랑하고 잘 보살필 의무와 권리가 있으니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살라고 하시던 말씀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언제나 지켜봐주세요, 어머니.
딸 미연 올림
지난 지금 알리게 되어 많이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알게되어 망설이던 중, 마침 고 김기환 동문의 아들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게 되었고, 딸(미국거주)을 만나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짧았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던 고 김기환 동문을 추모하며 여러 친구들에게 소식 알리며, 딸의 편지를 통해 그 삶을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께,
어머니 그곳은 편안하신가요?
항상 엄마! 라고 부르던 어리광쟁이가 이제와서 어머니라고 불러봐요.
제 나이도 벌써 스믈일곱, 살아계실 적 의젓하게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 것이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요.
재작년 9월에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저는 어린애처럼 어리광 부리고, 짜증을 내기도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많이 울었습니다.
언제나 제 곁에 계셔주실 거라고 믿었기에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버팀목, 어머니가 이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힘들었어요. 이루 말 할수 없는 슬픔에 눈물만 계속 흘렸지요.
그런데 얼마 전 이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매주 토요일마다 함께 등산을 하던 모임 기억하시지요?
그 키위(뉴질랜드 인)친구들 중 한분이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함께 간 저에게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니? 너의 어머니가 항상 지켜봐주시는 거 알고있지?" 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였지요.
그러나 사실은 어머니 생전에 부리던 어리광을 돌아가신 후에도 부리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그저 아이처럼 울기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는 생전의 어머니를 회고하며 남겨주신 가르침과 추억으로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버팀목을 쌓으려고 해요.
어머니는 지금의 제 나이에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비싼 소갈비 공세에 결혼해, 오빠를 낳으셨다고 하셨지요.
4남2녀의 장녀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묵묵히 감당하셨던 어머니는 아내로서도,어머니로서도 늘 묵묵히 인내하고
희생하며 살아 주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은, 돌아가신 후에도 항상 원하시던 장기기증으로 이어졌지요. 어머니의 장기가 여러명의 환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는 뉴질랜드 장기 기증협회의 편지를 읽으며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렸답니다.
1996년 아버지 정년 퇴직후 뉴질랜드로, 온 가족이 이민을 막 왔을때가 생각납니다.
영어라는 생판 다른 말을 하는 이국 생활이 적응키 힘들었을 수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침착함과 인내심에서 배어나오는 탁월한 듣기 실력에, 아버지의 거침없는 말하기 실력이 더해저 우리 가족의 뉴질랜드 생활이 꽤 순탄하게시작할 수 있었지요. 따뜻하고 친절하셨던 어머니, 언제나 바르고 옳은 말씀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셨던 어머니.
어느 상황에나 맞아 떨어지던 그 지혜로운 생각과 논리를 왜 오빠와 저는 철없이 흘려듣곤 했었는지....
참 오빠는 작년 12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새 언니는 요리를 참 잘해서 유난히도 맛있던 어머니의 식혜 맛을 비슷하게 냅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설마 자신이 그렇게 가실 줄모르고 추석이라 손수 만들어 놓으셨던
식혜를 오빠와 밥알까지 긁어먹으며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참 빨리도 갑니다.
시간을 쪼개어 아껴 쓰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꺼내 봅니다. 누가 보아도 탄성이 나올 만큼 멋진 필체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제게 격려의 편지를 써 주시곤 하셨죠.
내 자신은 내가 주인. 사랑하고 잘 보살필 의무와 권리가 있으니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살라고 하시던 말씀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언제나 지켜봐주세요, 어머니.
딸 미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