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산행기(1) 이 성 희
봄부터 시작된 旅程을 이제 11월 들어 마무리하게 되었다.
지나간 일은 다만 꿈을 꾼 듯, 기억이 안개 속을 헤맨다.
올 한 해 되돌아본 50년간의 이야기는 오롯이 과거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제는 또 다시 기댈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더딘 걸음을 내 딛는다.
이른 아침 교대역. 네 대의 우등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각 버스의 조장들은 벌써 출석 체크에 분주하다. 맨 끝 4호차에 탔다.
20여 분 후 죽전에서 분당친구들을 마저 태우고 다시 출발. 정오를 조금 지나 점심식사 장소인 함양에 도착했다. 봄에 왔던 곳이라 익숙하다.
버스가 모두 도착하니 식당 앞마당이 한꺼번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모습으로 꽉 들어찼다.
한 참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銀髮의 시애틀 친구, 그동안 많이 부풀어 오른 몸매 탓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 몇 십 년 만인가. 어깨를 서로 마주 잡고 흔들며 홍소를 터뜨렸다. 먼 데서 벗이 찾아오니 참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점심식사
후 함양을 떠나 3시
경 마리나 리조트에 도착했다.
통영은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주민 대다수가 어업 등에 종사하는 거친 삶을 사는 풍토 속에서 갓, 소반, 경대, 문갑 두석장, 나전칠기 등의 섬세한 수공업이 발달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또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소설가 김용익 등의 유수한 문인이 배출된 예향이기도하다.
박경리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참척의 슬픔을 당하여 누구보다도 불행했으나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이 시대의 大鵬으로 자리매김했다.
박경리
기념관은 원주의 문학관과 더불어 이 땅의 불멸의 작가를 만나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진주여고
출신의 작가는 末年에
고향을 떠나 원주에 가 살았지만 老年에
이곳으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편히 잠들어 있다.
죽음을 예감한 듯 臨終 직전에 남긴 시 한 수가 가슴을 울린다.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남쪽과
서쪽으로 난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무수한 섬들이 日沒과
합쳐지면서 장관을 이루는 달아공원의 해넘이를 보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숨죽이며 서 있다.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려는 것처럼,
이윽고
섬 사이로 홀연히 불덩어리가 사라진다.
모든
사람들의 탄성과 함성소리 물결 위에 퍼진다.
붉게
물든 구름은 깃털처럼 흩어지고 어둠이 四圍에
내려앉는다
식당에
돌아와 통영시내의 夜景을
바라보며 맛있는 대구탕으로 저녁식사를 끝낸 후 차 한 잔을 들고 리조트 뒷문으로 나섰다.
바닷
바람이 상쾌하게 밀려온다.
어두운
밤이다.
마침
상현달이 떠올라 찰랑이는 물결을 은빛으로 수놓고,
우리
房
친구들은
모두 손을 잡고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빛이
이울자,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나온다.
검푸른
하늘이 크고 작은 별들의 무리로 가득 찼다.
별을
만나지 못한 차마고도에서의 아쉬움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이따금
나타나는 가로등 불빛,
어디선가
낭만적인 선율이라도 흘러나올 듯,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해변도로에는 어느 새 우리 일행들의 행렬로 길게 이어졌다.
모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아----좋구나!
이틀 째.
9시에
호텔을 나서서 미륵산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
정상
전망대에 오른다.
이곳에서는
사방이 타악 트여 5백
2십
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통영의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햇살이
바늘처럼 눈을 찌르고 반짝이는 물결 사이로 점점이 퍼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
저
멀리 대마도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저
많은 섬들이 모두 연결되면 국토가 그만큼 넓어지려나.
숙소 앞 바다에 정박한 수많은 요트들. 2013년에 준공된 통영국제음악당의 위용, 땅 끝에 위치한 소도시 같지 않은, 외국의 어느 항구에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황혼이
깃들 무렵,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음악당의 앞뜰에 앉아 차를 마시며 파도소리를 벗 삼아 아름다운 사람과 깊은 얘기 나누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다만
상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한산섬
부두에서
15분
정도 배를 타고 내려서니 소나무 숲이 울울한 해변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순신의
최대 전승지인 한산대첩을 이룬 곳으로 정유재란 때 원균의 참패로 폐진되었던 것을 1739년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遺墟碑를
세웠다.
경내에
<노량해전도>·<사천해전도>·<한산대첩도>
등이
그려져 있는 제승당과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한산정(閑山亭)·수루
등이 있다.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 거북등대가 서 있다.
또한, 이순신의 정신을 받들어 해마다 9월에 한산대첩제가 개최된다. 이 섬에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및 정월 초하룻날 당산에 모여 승려가 먼저 산신제를 올리고 해 뜰 무렵 전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동제 및 풍년제·풍어제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땅을 밟아보니 흙 한 줌 나무 한그루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젊은이들이 역사를 익혀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지금부터라도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이 교육자들이 명심해야할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해변
모래톱에서는 몇 마리의 갈매기들만이 무심히 날고 있다.
三道水軍統制營(사적 제 402호)
통제영은 壬辰倭亂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선조 16년(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새로 만들어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이를 겸임케 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제사의 본영을 삼도수군통제영 또는 약칭으로 통제영, 統營이라 했으며, 임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선조 36년(1603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곳 두룡포(현 통영시 관내)로 정하고는 통제영터를 닦기 시작하여 2년만인 선조 38년(1605년) 세병관 ,백화당, 정해정 등을 창건하여 고종 32년(1895년) 각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다. 韓日合邦 이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만 남겨두고 대·소관아 100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이후 학교, 법원, 검찰청,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세병관 및 주변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유구가 확인되었다.
세병관(국보 305호)
일제 때 세병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사라짐.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기둥,
2익공
양식에 통 칸으로 만들어져 질박하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 晩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으로 제 137대
통제사 徐有大가
현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