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와라
고대 에집트의 사서(死書)에 의하면 저승에 가서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당신은 주어진 삶을 얼마나 즐겼는가?
그리고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융화되기가 불가한 두 개의 명제인 것 같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삶의 비극은 삶이란 나중에야 이해될 뿐인데 우리는 그 보다 먼저 살아야 한다는 운명이다.
무엇인가 깨닫게 되었을 때는 죽음의 천사가 다가와서 “네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것이 바로 너의 삶이었다.”라며 데리고 간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벌거숭이 상태에서 전지전능한 부모님의 절대적 보살핌으로 길들여지고 자라서 학교와 사회에 나가 타인들과 부딪친다.
철저하게 개인주의와 물질만능 사상에 물들여진 현대인에게는 모든 낯선 사람들은 나의 출세를 가로막는 걸림돌이고 경쟁자이며 성공을 위하여는 짓밟고 넘어 가야할 귀찮은 존재로 생각된다.
돈으로서 과외공부하고 해외유학으로 남보다 한발 앞서 기회와 방법을 잡아야 먼저 출세하고 편안한 삶이 보장된다면서 이웃을 무시하고 멀리하며 스스로가 고립된 성안에 살기를 원한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어울리기 보다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헛된 망상에 스스로 힘든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 된다는 광신적 물질주의에 몰입되어 모든 생활의 좌표를 배금 지향적으로 짜고 있다.
돈 버느라고 건강도 잃고 미래에 골몰하다 결국 현대와 미래도 다 놓쳐 옳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인생은 고달프다며 후회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생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행복을 원한다.
돈으로 쌓아 올린 성안에서 나 홀로 왕이 되어본들 결코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교감으로 스며 나오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과시하기 위한 과포장이나 쾌락은 요요현상으로 이내 익숙해지면서 시들어진다.
우리는 행운을 기다리느라고 주위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산다.
왜냐하면 행복은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쌓여있기 때문에 겉모양만 봐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온실 안에 화초같이 과보호함으로써 고통의 보자기를 풀어볼 기회를 주지 않아 행복을 접할 수도 없다.
돈은 벌수록 여유보다 욕심이 많아지고 이웃을 멀리하게 된다.
한순간 만족과 과시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값비싼 물건을 잔뜩 쌓아두고 지키느라고 뼈 빠지게 일하고 돈 벌다가 지쳐 인생은 고달프다고 후회한다.
소유와 향락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지만 이내 허전함을 느끼고 더듬이 잃은 곤충마냥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허우적거린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대물림한다.
재물보다는 체험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친다면 고기를 주는 것 보다 잡는 방법을 익혀 인생을 풍요롭게 살지 않을까
나 하나는 낱생명이라기 보다는 세상 만물이 한데 어울려진 온생명의 일부이다.
누군가 아프면 나 또한 불편하다.
개인적 이해타산에 밝은 똑똑이 보다는 세상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똘똘이가 멀리 오래가지 않겠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원하는 것을 갖게 되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치 않은 것을 멀리하면서 마음이 여유로워 진다.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으면 행복은 재산과는 무관하다.
돈이 모자라서 불행한 것이 아니다.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결핍하다는 자격지심에서 속상해 한다.
Victor Frankl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경험을 토대로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고통이 아니라고 한다. 삶의 의미를 알면 견딜 힘이 생길 뿐만 아니라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행복은 고통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얼굴을 보인다. 고통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는 행복의 열매를 맛볼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이고 유일한 순간이다.
바로 지금 행복하다면 내일도 행복해 진다.
의사는 비교적 다른 분들 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자랐다.
그리고 신이 미쳐 손보지 못한 것을 돌보라고 천부적으로 남다른 재능을 부여 받은 선택된 인간으로 행복에 한발 가까이 있다.
이 탁월한 능력을 본인과 가족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탐욕일 뿐 아니라 스스로가 좋은 삶의 기회를 상실하고 불행한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 동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 모자라는 이웃과 나눈다면 큰 사랑이 될 뿐 아니라 어울림이 되어 되돌아와 기쁨이 배가 되어 우리 삶을 충만하게 된다.
어느 농부의 이야기이다.
훌륭한 옥수수 씨앗을 구하여 이웃의 부탁도 뿌리치고 자기 밭에만 뿌렸다. 가을 추수때 형편없는 옥수수가 열렸다. 왜냐하면 이웃 농부들의 품종과 화분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동네 농부들에게 씨앗을 나눠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대만족이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가는 곳도 아니다.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산다면 이 세상이 곧 천국이고 사후 따로 준비된 천국이 있다면 우선 가지 않을까.
세월이 쌓여 다듬어진 디딤돌을 밟고 멀리 바라보니 먼저 가신 분들이 남기고 간 후회가 장막에 어렴풋이 보인다.
좀 더 참을 것. 그리고 용서하고 베풀며 사랑하여야 하는 것인데...
타인과 어울려 나눌 때 진정 나의 인생이 즐겁고 아름다움으로 장식 된다.
내 이웃이 나의 스승이요 형제이며 자연이 나의 헛된 부위를 감싸준다.
모자란 이웃과 비비며 더불어 산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행복이라는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웃과 나눌수록 나에게는 인생을 내다보는 혜안이 열리고 즐거움이 많아진다는 진리 즉 배품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삶의 존재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신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는데 우리는 안중에 없을뿐더러 걷어차고 있지 않을까.
인생은 순간순간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지만 매사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 천상병 시인 따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귀천할 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