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하늘에 간 홍중선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대신 써본 것입니다. 그의 별세 직후 이미 소개한 바 있는 글인데 내일 어머니날이 되니 또 생각이 났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엄마
날이 저물 때 집안으로 들어서니
철부지 나도 피곤하였다
해도 힘겨운 듯 우리집 기와 지붕위에서
쉬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오고 싶었나
붉은 햇빛 치마폭이 대청 마루에 가득하였다
왜 그럴까 그들의 얼굴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뭘 피하기라도 하듯 표정을 감추고
평소 잘 안보이던 친척들까지 다 모여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엄마
나는 늘 나갔다 돌아오면
누워있는 엄마를 찾았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엄마가 안보였다
재빨리 할머니가 내 마음을 가리듯
그의 포근한 팔로 나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엄마 어디 갔어요
할머니의 팔에 점차 무게를 느껴 갑갑하여 내가 물었다
응 중선아 네 엄마 멀리 미국에 갔단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좀 단호하였지만 그의 팔은 떨리었다
역시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가 이렇게 자신이 없어 보이긴 처음이었다
시간과 날들이 지나가도
밖에서 놀다 돌아온 나는 엄마의 고무신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대청마루에 가득한 햇빛 치마폭만 보였다
엄마가 돌아올때까지는
오래 걸릴 것만 같았다
아니 엄마는 아주 안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이 생각을 숨기기로 하였다
나의 슬픔을 보는 어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보다
더 클 까봐.
나의 친구 중선이가 하늘로 가기전 몹시 피곤한 가운데 억지로 입을 열어 이 이야길 들려주면서 당시 어렸을 적의 이 기분을 글로 옮기어 달라고 부탁 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 기분은 그에겐 단순히 기분이 아니고 가슴을 애이는 평생의 아픔이었다.
어릴 때 자기를 끔직이 사랑해 주던 엄마를 지병으로 잃은 경험을 한 사람이 어디 중선이뿐이랴.
하지만 60중반의 중선에게는 자신의 죽음의 문턱에서 견디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외롬이 “엄마”의 그 아픔과 같았으리라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도 엄마의 일부라는 것을 더욱 느끼었던 것 같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 써볼께 라고 건성으로 대꾸 하고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더 버티기가 힘들어 중선이의 당시의 기분을 가늠해가며 이제서야 글로 옮기어 보았다.
사실,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이 글을 내가 정서하여 그에게 검열을 받고 다시 보여준들 그의건강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생전에 쓸 용기가 없었다. 혹시나 그의 눈에서 눈물자국을 보기도 싫어서였다.
중선으로 부터 더 전해 들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있으나 나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표현력도 따라가 주지 못하여 잘 못쓸 것 같다. 또 이제는 다시 물어보고 검열도 해야 할 그친구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2010년 9월 7일 씀
돌아오지 않은 엄마
날이 저물 때 집안으로 들어서니
철부지 나도 피곤하였다
해도 힘겨운 듯 우리집 기와 지붕위에서
쉬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오고 싶었나
붉은 햇빛 치마폭이 대청 마루에 가득하였다
왜 그럴까 그들의 얼굴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뭘 피하기라도 하듯 표정을 감추고
평소 잘 안보이던 친척들까지 다 모여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엄마
나는 늘 나갔다 돌아오면
누워있는 엄마를 찾았다 그런데 오늘 저녁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엄마가 안보였다
재빨리 할머니가 내 마음을 가리듯
그의 포근한 팔로 나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엄마 어디 갔어요
할머니의 팔에 점차 무게를 느껴 갑갑하여 내가 물었다
응 중선아 네 엄마 멀리 미국에 갔단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좀 단호하였지만 그의 팔은 떨리었다
역시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가 이렇게 자신이 없어 보이긴 처음이었다
시간과 날들이 지나가도
밖에서 놀다 돌아온 나는 엄마의 고무신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대청마루에 가득한 햇빛 치마폭만 보였다
엄마가 돌아올때까지는
오래 걸릴 것만 같았다
아니 엄마는 아주 안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이 생각을 숨기기로 하였다
나의 슬픔을 보는 어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보다
더 클 까봐.
나의 친구 중선이가 하늘로 가기전 몹시 피곤한 가운데 억지로 입을 열어 이 이야길 들려주면서 당시 어렸을 적의 이 기분을 글로 옮기어 달라고 부탁 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 기분은 그에겐 단순히 기분이 아니고 가슴을 애이는 평생의 아픔이었다.
어릴 때 자기를 끔직이 사랑해 주던 엄마를 지병으로 잃은 경험을 한 사람이 어디 중선이뿐이랴.
하지만 60중반의 중선에게는 자신의 죽음의 문턱에서 견디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외롬이 “엄마”의 그 아픔과 같았으리라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도 엄마의 일부라는 것을 더욱 느끼었던 것 같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 써볼께 라고 건성으로 대꾸 하고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더 버티기가 힘들어 중선이의 당시의 기분을 가늠해가며 이제서야 글로 옮기어 보았다.
사실,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이 글을 내가 정서하여 그에게 검열을 받고 다시 보여준들 그의건강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생전에 쓸 용기가 없었다. 혹시나 그의 눈에서 눈물자국을 보기도 싫어서였다.
중선으로 부터 더 전해 들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있으나 나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표현력도 따라가 주지 못하여 잘 못쓸 것 같다. 또 이제는 다시 물어보고 검열도 해야 할 그친구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2010년 9월 7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