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서 그리운 것들
김 풍자
행복보다 아픔이 더 많이 깃들어 있던 우리들의 고교시절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 갔지만 우리 모두
가 가난했죠. 칠판 꼭대기에 씌여져 있던 단기 4294년 10월, 하지만 훌륭한 은사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 ‘더 좋은 내일이 온다’는 말씀을 새겨 들으며 꿈과 희망을 키워 가던 시절
교복
남학생들은 검정색 교복과 여학생 곤색 사지 몸빼바지, 학생가방과 신주머니. 그때 남학생들은 까까중 머리여야만 했고, 여학생들은 귀밑에서 1센티 까지만 내려오는 단발머리. 멋좀 부리고 싶어서 삐딱하게 쓴 교모 밑에 숨겨진 긴 머리카락은 조태을 선생님 손에 든 가위로 땜통이 되거나 바리깡으로 고속도로 나기도 했지요. 아무리 크게 사서 입힌 교복도 쑥쑥 자라던 시절이라 일년만 지나면 동네 양복점에서 ‘우라까이’를 해서 입혀도 다음해에는 껑충 올라간 몸빼바지가 발목위로 훌쩍 끌려 올라가곤 했지요.
벤또
먹어도 배 고팠던 시절. 비록 양은 도시락통에 싸온 반찬은 신김치, 장아찌, 멸치조림이었지만 점심시간이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나눠 먹었죠. 계란 부침은 그야말로 금수저였죠. 겨울철 난로에는 도시락이 탑처럼 쌓여 교실안은 구수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차곤 했어요.
소풍가서 간단한 해설을 들은 후 허겁지겁 까먹던 삶은 달걀, 어쩌다 한번 먹게 되는 짜장면은 맛의 신세계였죠. 한밤중 소리치던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 소리 앳된 소년들이 어깨에 통을 메고 땀을 흘리며 외치던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소리, 어머니가 마루에서 두드리던 다듬이 소리와 밤마다 남포불 밑에서 해진 양말을 기우시다 내뱉는 한숨소리, 잠시 그리움에 눈가가 촉촉해 오네요.
특별활동
아직도 도서반, JRC 기독학생반 친구들은 모이고 있으니.... 그 시절 우리들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중간 시험이 끝나고 가는 단체 영화 관람에서는 휘파람과 박수를 열렬히 쳐댔고, 선생님 몰래 다니던 시큼한 냄새나는 삼류극장에서 동시상영을 볼 때면 중간 중간 정전이 되어서 필림이 끊기거나, 다시 돌아가는 필림에서는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리기도 했고, 옆에 앉은 건달이 슬쩍 손을 잡으려해서 따귀를 올려치면 눈을 부라리며 자리를 뜨기도 했어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 가사를 받아 적기 위해 백열등 아래 엎드려 몽당 연필을 쥐고 한글로 한자 한자 들리는대로 받아 적기도 했어요. 그 사춘기 때 감성으로 우리가 평생 사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찍은 손바닥 반만한 사진 뒷면에는 조금 바랜 글씨가 남아 있네요.
‘1961년 10월 1일 나의 영원한 친구들과 태릉에서’
그땐 친구들끼리 편지를 보내거나 펜팔을 하기도 하고 국군 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도 썼어요. 간혹 시대를 앞지르는 선각자 중에는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정성을 기울여 쓰고, 다음날부터 기대에 부풀어 우편함을 열어 보며 기다림과 반가움에 가슴 설레기도 했지요.
세월이 앗아간게 청춘뿐이랴!
하지만 그때 훌륭한 은사님을 모시고 같은 교정에서 함께 배우고 기뻐했고,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던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가슴에 또렷한 영상으로 지니고, 그리움의 끈들을 함께 잡고 남은 세월을 함께 걸어갈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