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안열전

by 사마천 posted Aug 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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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列傳(사마천)에서 관안열전 중 관중편을 소개합니다. 

  

  管仲(관중)은 潁水(영수)1) 유역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항상 鮑叔牙(포숙아)와 어울려 지냈는데, 포숙은 그의 才德(재덕)을 잘 알아주었다. 가난한 관중은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늘 그를 잘 대해주었으며 그런 일로 이러니저러니 따지지 않았다. 얼마 후에 포숙은 齊(제)나라 公子 小白(소백)을 섬기게 되었고, 관중은 공자 糾(규)를 섬기게 되었다. 소백이 즉위하여 齊桓公(제환공)이 되고 규가 죽자, 관중은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니 관중은 등용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제 환공은 천하의 패자가 되어 제후들과 여러 차례 會盟(회맹)하고 천하를 바로 잡았으니, 이는 모두 관중의 智謀(지모)에 의한 것이었다.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곤궁하게 하였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서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召忽(소홀)2)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하였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에, 자신은 아랬자리에 있으면서 관중을 만들었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10여 대 동안 소유하면서, 항상 名大夫(명대부)의 집안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재덕을 칭찬하기보다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포숙을 더욱 칭찬하였다.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작기는 하지만 해안을 끼고 있는 제나라는 산물을 교역하고 재물을 축적하여 부국강병에 힘쓰게 되었으며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백성들은 곡식창고가 가득 차야만 예절을 알며, 의식이 풍족해야만 榮辱(영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준수하면 六親(육친)3)이 굳게 단결하게 되고, 四維(사유)4)가 해이해지면 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위에서 내린 명령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논의된 정책은 평이하여 백성들이 실행하기 쉬웠으며,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베풀어주고 백성들이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뜻대로 제거해주었다. 관중이 정사를 시행할 때에는 禍(화)가 될 일도 잘 이용하여 福이 되게하고 실패하게 될 일도 잘 처리하여 성공하게 하였으며, 일의 輕重(경중)을 잘 헤아리고 그 득실을 저울질하는데 신중하였다. 예를 들면 제 환공이 실제로는 少姬(소희)5)의 일로 화가 나서6) 남쪽으로 蔡(채)나라를 공격한 것인데, 그때 관중이 (채나라와 근접한) 초나라를 함께 공격하여 초나라가 周 왕실에 包茅(포모)7)를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8). 또 사실은 환공이 북쪽으로 山戎(산융)9)을 정벌한 것인데, 관중은 그 기회에 燕(연)나라에게 召公(소공)의 선정을 실행하도록 한 것이다. 또 柯(가)10)에서 회맹 할 때 환공이 曹沫(조말)11)과 약조한 것을 어기려고 하자 관중이 그 약조를 지키도록 하니, 이 일로 인하여 제후들은 제나라에 順服(순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것이 바로 얻는 수단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정치의 비결”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관중의 재산은 제나라 왕실의 재산만큼이나 많아 三歸(삼귀)와 反坫(반점)을 갖추고 있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이를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에서는 그의 정책을 받들어 언제나 다른 제후국보다 강성하였다.


  註) : 1) 潁水 : 강 이름, 지금의 하남성 동부와 안휘성 서북부에 있다. 2) 召忽 : 관중과 함께 공자 규(糾)를 보좌하였던 제나라 사람. 3) 六親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보통 父,母,兄,弟,妻,子를 가리킨다. 4) 四維 : 禮(예),義(의),廉(염),恥(치)의 4대 강령을 말한다. 5) 少姬 : 제 환공의 부인. 6) 제 환공과의 뱃놀이에서 배를 흔들어 환공을 놀라게 한 죄로 모국 蔡나라로 쫓겨난 少姬를 채나라에서 개가시킨 것에 환공이 격노한 일을 말한다. 7) 包茅 : 참억새로 만든 제사용품. 8) 이것은 채나라를 공격한 것에 대의명분을 세우기 위한 관중의 지모이다. 9} 山戎 : 부족의 명칭. 10) 지금의 산동성 東阿縣. 11) 魯나라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