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6 - 서정주의 [三更]

by 이진흥 posted Aug 04, 200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푸르른 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국화 옆에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冬天)/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문둥이)/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花蛇).... 등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편들을 남겨준 서정주 시인, 지난 2000년 그가 떠났을 때 과거 그의 정치적 훼절로 대단히 비판이 많았었지요. 그에 대한 평가는 거의 극단을 오갑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인용했던 시구들이 젊은 날 우리들의 가슴을 울려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의 [三更]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의 한 복판에 아직 쌀쌀한 봄날에 피어나는 새빨간 동백꽃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것도 별다른 느낌이 들 테니까 말입니다.

-------------------------------




이슬 머금은 새빨간 동백꽃이
바람도 없는 어두운 밤중
그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깊은 강물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서정주(1915-2000), [삼경(三更)] 전문

-------------------

바람도 없는 깊은 밤중에 이슬 머금은 새빨간 동백꽃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득한 높이에서 한없는 깊이로 추락하는 존재자의 비극적인 모습이 두렵도록 아름답습니다. 시인은 섣부른 예측이나 감상을 노출하지 않고 추락의 이미지만 제시할 뿐입니다. 고요와 어둠, 벼랑이라는 수직의 절벽, 깊게 흐르는 강물, 소리 없이 떨어지는 중심 이미지로서의 새빨간 동백꽃....... 이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비극적 정황 속에서, 갑자기 뼈가 저리는 고독과 소멸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잊고 있던 존재망각에서 깨어나 자신의 실존과 조우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진 흥 - 매일신문, 2005/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