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열린 기우회모임에 참여하고

by 노준용 posted Jul 0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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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의 고장 청주에서 훈장을 하는  박기양 기우들을 초대했다.
서울에 왔다갔다 하기에 딱히 멀다고는 못하는지역이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가깝다고 못할 아리까리한 곳에 떨어져 있어 동창행사에 열심히
참석치 못한다고 생각하는 박교수가(선농축전에도 매번 참석하는데...)
 기우회를 초대하면 지 기분이 풀릴거라는 생각에서란다. 


그의 가상한 생각에 한달전 회장 권영직이 의견을 묻고 기우들이 찬동해서
그동안 교대근처에서만 놀던 기우회가 사상 (기우회도 4년의 역사를 쌓아 왔으니
이런 표현이 그리 과하진 않겠지 싶다) 처음으로 제 40회 대회를 청주에서 열었다.


엊그제 7월 3일 북상하는 민들레를 맞으러 권영직, 강기종, 김동웅  김용호, 노준용,
유병렬, 정기봉, 장재원, 천주훈이 차 두 대로 나누어 10시 20분에 내려가고
현지에서 박기양과 접선하여 우리가 따라 간 곳은 상당산성(上黨山城) 이다.


여기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이란다.
신라시대때 쌓은 산성이라는데 청주시에서 돈을 제법 들여 잘 가꾸어 놓았고
사적지라기보단 한눈에 유원지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연못엔 아베끄족들이
찾아와 산책하며 고기밥을 던져 주는 풍경이 보기에 좋다.


이 동네 제일의 음식점 연승주막에서 산성일대의 풍광을 바라보며 점심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여름 경치에 걸맞는 것은 역시 빈대떡과 파전 그리고 소주이어야
낭만을 안다 할 것을 이건 말이지 음식과 술 선택이 잘 못되었다.
아 여기에서 웬 닭도리탕이고 시바스리갈이란 말이냐.
(강기종이 정성으로 가져 온 거니 할 수 없이 마시긴 했다만.)


식사후  바로 그 자리에서 다섯 개의 바둑판을 차려 놓고 우리는 대국을 시작했다.
이 시간이 오후 한시반.  이제부턴 신선놀음이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시간이 후딱 간다는 게임이다.
역시 일곱시가 지나서야 우승자를 가리고 대회는 끝났다
열명이 대국한 결과 4승무패의 연전연승을 한 선수가
유병렬.
이 선수는 10월 선농바둑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낼 강력한 후보가 된다.
우리의 호프 유병렬이 기우회에서 실력 있음을 드러낸 날이다.


다시 시내로 나가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김동웅의 기억에 의하면 박기양의 본이 반남인데 출석을 부를 때 선생님이 너 본관이
어디냐고 물으니 발남 박가입니다라고 대답해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다 발랑 까진 박가로
알아듣고 웃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 우리는 순진무구한  발랑박가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니라.


바둑대회는 끝나고 저녁까지 먹었으니 이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이 악당들이 이 사간에 그냥 갈리 없다.
그래서 7월 10일 토요일에 열리는 당구대회의 축소판 예비대회를 가졌는데..
바둑 얘기도 박기양 얘기도 아닌 걸 사족으로 붙이면 
편먹기 대회에서 권영직/노준용조를 무참하게 연속으로 분루를 삼키게 한 선수가
천주훈/ 김용호의조의 김용호였다는 사실이었다.
이 선수의 기여도는 88퍼센트. 30개중 26개, 2개중 2개, 15개중 12개이면 놀랠 노자를
쓸만 하리라. 그러나 지가 맨날 그러하랴. 7월 10일이면 판가름 날 것을..


밤 열시반 이젠 서울로 가야 한다.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밤의 고속도로를 가야 할 것이냐.
더구나 비오는 밤인데.. 비가 이리 오고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갈 자신이 있다는 쪽이 소수파의 권영직, 강기종,김동웅, 정기봉이고
다수파는 잔류했다. 청주유지 박교수가 다시 초정의 시립관광호텔을 잡아 숙박까지
책임져 주어 잔류파는 약수온천도 마다하고 호텔방에서 밤새워 바둑 실력을 연마했으니...
 
이 글을 읽는 우리 친구들이여
10월에 열리는 선농바둑대회에선 작년보다 기량이 발전한 결과를 보일 것임을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