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따콩(47)-- '인사'

by 한병근 posted Apr 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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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사

   내가 지금 살고있는 천안은 온천 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온양온천, 아산온천, 도고온천이 30분내 거리에 있고 조금 더 나가면 덕산이나 유성온천도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는 주말마다 온천에 다녀온다. 오가는 길목에 정갈한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어 식사시간이 되면 가끔 들른다.  B곰탕은 내가 자주 가는 식당 가운데 하나다. 값이 비싸지 않은 편인데다 음식도 깔끔하고 맛이 좋지만, 그 집 주인 양반은 꽤 거만한 사람인듯싶었다. 몇 차례나 그 식당에 들러 낯이 익었을 터인데도 카운터를 지키며 계산만 할 뿐, 한번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여러 번 만나는 사람과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게 어색해서 내가 먼저 인사를 시작했다. 갈 때마다 일부러 큰 소리로 “안녕하셔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몇 번인가 그렇게 반복하자 그도 나를 보면 먼저 인사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역시 인사를 하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지만, 그 사람의 전직은 공무원쯤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내 생각은, 남의 인사 받는 데 익숙하지만 먼저 인사하는 데에는 인색한 일부 못된 공무원들에게서 받은 편견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주인이 바뀌었다. 주인 태도에 비해 영업이 잘 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비싼 값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긴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다른 식당에서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산온천 가는 길가에 새로 개업한 식당이 눈에 띄어 들렀는데, 먼 발치에 전 곰탕집 주인이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 못 본 척 눈 길을 돌렸다. 아내와 내가 식사하는 동안 그가 식당 안에 들어왔으나 역시 못 본체하고 나가 버렸다. 종업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가 그 집 주인이란다. 그 태도가 마치 당신에게 인사하기 싫어 식당을 새로 차렸는데 여기까지 찾아왔냐고 항의하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괜찮던 비빔밥 맛까지 갑자기 떨어졌다.

   식당에는 식사하러 가는 곳이지 인사 받으러 가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주 가는 손님에게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대한다면 그 집의 고객에 대한 정성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내가 그 집 영업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그 식당에 가지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식당이 그 집뿐인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주인이 하는 식당에 다닐 이유가 없다. 이 모든 생각이 오로지 인사 하나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오래 전 어떤 조찬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도착하는 순서대로 예닐곱 명씩 한 식탁에 자리 잡고 식사를 한 다음, 주제 발표와 토의가 이어지는 게 이런 모임의 순서다. 그날 내가 앉을 테이블엔 면식 있는 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자리에 갈 때마다 평소 했던 대로 눈 인사만 하는 척하고 자리에 앉아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한 외국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기 전에 식탁을 한 바퀴 돌며 먼저 도착한 사람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그 바람에 묵묵히 식사하던 사람들도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명함을 받고 보니 비록 초면이었지만 대개 알만한 회사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자연스레 말문이 트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한 테이블에 앉아 한마디 대화도 없이 식사를 하는 게 얼마나 멋쩍은 일인지 이런 경우를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느끼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먼저 인사를 청하고 말문을 트는 게 우리에겐 그리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그날의 경험은 내겐 아주 귀중한 체험이었다. 그 뒤 나는 이런 자리에 갈 때마다 먼저 인사를 청한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면 말문이 트이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정보도 얻게 된다. 그 동안 왜 바보같이 이렇게 쉬운 일도 못하고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침 저녁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같은 아파트, 같은 줄에 살면서도 승강기안에서 인사하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긴 것은 아니로되 팔 펼치면 닿을 비좁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 마주친 듯 눈길도 주지 않고 딴전 피며 있어야 하는 시간이 내겐 아주 어색하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한다.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받아주면 좋은데 언제 봤다고 인사를 하느냐는 투로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인사할 시간을 놓치고 그렇게 되면 어색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이런 습관도 해외출장 다니며 보고 배운 일이다. 해외에 나가면 호텔 복도나 엘리베이터 또는 로비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흔히 만난다. 단순히 눈 인사에 그치는 게 아니고 대개 “굿 모닝” 또는 “하이” 하며 간단한 인사말을 하는 게 보통이다. 처음엔 좀 쑥스럽더니 버릇되고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특히 승강기 안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아침인사를 나누면 어색한 느낌이 일순 사라진다. 날씨나 간단한 관심사로 대화가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밖에 나가면 쉽게 잘 하던 짓도 돌아오면 의식적인 일로 바뀌고 만다.

   오죽해야 ‘좋은 나라 운동본부’라는 TV프로그램이 생겼을까? 이 프로에 제대로 인사 받는 사람을 찾는 코너가 있다. 식당이나 대형 할인점 같은 곳에 도우미를 세워 오가는 손님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 인사에 응답하는 사람을 찾는 게 이 기획 프로의 내용이다. “네, 수고 하셔요.” “네, 잘 먹었습니다.” 또는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데 두 세시간이 좋게 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딴전 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치고 만다. 눈을 맞추고 고개라도 까딱하거나 미소로 답례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찬하며 살아온 우리 역사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동방예의지국’은커녕 무례하기 짝이 없다. 다른 사람의 정성스런 인사를 깔아뭉개는 짓을 ‘무례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나는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는 사람에게는 무척 친절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너무 무뚝뚝하다고 말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평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하는 소리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특히 객지에 나가 혹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예외 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한번 물어서 가르쳐 주는 대로 찾아 갈 만큼 알려 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가르쳐 준 방향으로 가면서 몇 번씩 반복해서 물어서 찾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약도를 그려가며 설명해 주지는 못할망정 성의껏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게 도리일 텐데 내겐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어떻게 보면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제대로 알고 가르쳐주는 건지조차 의심스럽게 턱짓으로 저쪽으로 가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로마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이 있다. 영어가 잘 통하는 않는 대표적인 나라가 이태리가 아닌가 싶다. 지나가는 사람 몇에게 길을 물었지만, 한결같이 영어를 못 알아들어 미안하다는 표정이 역력하여 묻는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할 지경이었다. 마침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에게 한참을 설명했더니, 말로는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듯 손짓으로 따라오라며 앞장 섰다. 그는 몇 블럭을 걸어 목적지까지 안내해 주고는 오던 길을 되짚어 갔다. 이 일로 나는 그 시끄러운 로마가 정겹게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람 만나기를 기대하는 일은 가뭄에 콩 나기를 기다리기보다 더 어리석은 짓일 게다.

   이렇게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친절은 그만두고라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인사라도 나누며 지내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돈도, 힘도, 시간도 필요 없는 일이요, 서로 기분 언짢아지는 일도 아닐 터, 마음만 먹으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낯 찌푸릴 일이 적지 않은 우리 대한민국, 이렇게 이웃간에 웃음으로 서로 만나는 아침, 저녁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나는 젊은 부인네나 아가씨, 또는 꼬마 친구들에게 웃음과 인사를 건네는 게 켕길 때가 있다. 혹 나이 든 치한은 아닐까, 혹 유괴범은 아닐까, 이렇게 경계하는 눈빛이 사라질 때까지는 말이다.

                                                                    (2004.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