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심
나는 부러운 게 많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그 게 그렇게 부럽다.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목소리를 타고 나서 남들에게 듣기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 데 내게는 왜 그런 목청 타고 나는 행운이 없었을까 하고 부러워 한다. 친구들 모임이나 아니면 직장에서 노래방에라도 함께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갖게 되는 생각이다. 직업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당연히 노래를 잘 해야겠지만 가수가 아니라도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많다. 슬픈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핑 돌도록, 신나는 곡은 어깨가 저절로 들썩이도록, 듣는 이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그 부러움 증이 도진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백지에 인쇄된 글씨를 통하여 읽는 이에게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부럽기만 하다. 자기가 가진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이것도 타고 난 재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 만난 적도 없고 무슨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을 하나도 거르지 않은 채 전달하여 생생한 느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불가사의하다.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수필가로 활동하는 작가는 직업이라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작가가 아니라도 남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척척 써 내놓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정말 부러운 일이다.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도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폭풍처럼 휘 몰아치다가 어느덧 가슴이 아리도록 애잔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연주를 들을 때면 그 사람을 부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직업과 관계없이 취미 삼아 악기 한가지쯤 연주할 줄 아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 사람들이라 해서 하루에 스물 다섯 시간을 가진 것도 아닐 터인데 언제 저런 능력을 갖게 된 걸까 부럽기만 하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연주자들의 솜씨가 부러운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말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게 또 부럽다. 도무지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듣는 사람을 쥐었다 놓았다 자기 마음대로 흔드는 말 솜씨를 가진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청중을 울렸다가 금새 웃기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표시 안 나게 자기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그 안에 옹글게 담아내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한이 없다. 저런 언변은 타고 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한 치 어긋남이 없는 논리로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도 부럽기는 똑 같다. 평소 자기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길래 저리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낼 수 있는 걸까 부러운 것이다.
남들 잘하는 걸 보며 부러워 하는 일은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게 많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도, 운동 잘하는 사람도, 내겐 모두 부러운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남들에겐 없는 타고난 소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내 친구 가운데 노래를 무척 잘 부르는 친구가 있다. 최신 유행곡이든 오래된 가요든 이 친구가 부르기만 하면 모두가 감탄한다. 진짜 가수보다 더 잘 부르는 노래도 한 두 곡이 아니다. 아는 노래도 무척 많다. 노래방 같은 데라도 같이 가면 다른 사람은 주눅이 들어 노래할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다. 나는 그 친구의 재주를 늘 부러워했다. 한번만 들으면 노래를 소화해 낼 타고 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새로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면 카세트 테이프에 그 노래를 반복하여 녹음해 놓고 차를 타기만 하면 따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소화할 때까지 이 짓을 반복하곤 한다는 거였다. 좋은 목소리는 부모님께 타고 났겠지만 스스로 그것을 갈고 닦아서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 다른 음악성을 타고 난 줄 알았더니 그가 노래 잘 부르는 데는 남 다른 노력이 숨어 있었다. 모르는 노래가 없는 것도 그만큼 애쓴 보람이 아니었나 싶다.
언젠가 TV를 보니 음치교정교실이란 게 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음감이 떨어져서 이른바 음치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여기 다니며 노력하여 이런 약점을 극복해낸 사람이 아주 많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런 음치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더구나 없다. 생각해 보니 이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 노래 연습 한번 해 본 일 없이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결국 이런 내 모습은 좀 심하게 표현하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일은 하지 않고 돈 많은 사람만 부러워 한 꼴과 다르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유명한 작자가 쓴 작업 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통하여 원고지 한 장도 채우지 못한 채 며칠밤을 지새우며 고심하는 작가의 숨은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 이런 사람쯤 되면 누에에서 실 뽑아내 듯 저절로 글발이 술술 풀려나오리라는 평소 내 생각과는 달리 한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탈고하여 출판까지 끝낸 작품을 몇 년 뒤 개작하여 다시 출간하는 경우까지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을 울리는 작품은 결코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유명한 작가가 이럴진대 직업작가도 아닌 사람이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쓴다는 건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 한편의 글을 쓰기까지 기나 긴 세월동안 그런 글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다 할 노력도 하지않고 그들의 글 솜씨만 헛되게 탐내왔다.
한 때 나는 남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부러워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악기와 악보까지 사 들이고 얼마동안 그 걸 붙들고 씨름도 했다. 그러나 연습은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굳을 대로 굳은 내 손가락만을 탓하며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유자재로 연주하기까지 그들이 흘린 땀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기만 했다. 아직까지 그 때 산 바이올린은 우리 집 장롱 속에 잠자고 있다. 한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말이다. 어느 정도 음감을 타고났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린 듯 실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경험도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운동 신경이 둔하다고 생각해 왔다. 체육시간에 달리기니 넓이뛰기니 이런 운동에서 나는 늘 남들보다 뒤졌고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축구나 배구, 배드민튼 등 뭐 더 이를 것 없이 모든 운동에서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져 맨 먼저 단념한 게 운동이다. 그래서 체육점수는 언제나 내 성적 가운데 맨 바닥이었다. 대학 다니며 한번도 체육시간에 결석하지 않고 C학점을 받은 건 나 뿐일 게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며 나이가 들어,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생각하면서 시작한 게 탁구였다. 아무 준비 없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어서 몇 년 동안 일과 후에 열심히 탁구를 했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 실력이 늘어 제법 남 부끄럽지 않게 치기에 이르렀다. 다른 운동은 해 본 게 없어 어줍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탁구 한가지는 할 줄 알게 되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꾸준한 노력의 결과였다.
남 다르게 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한가지일 게 틀림없다. 평소 그 일에 얼마만큼 정열과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을 결정하는 요인이지 결코 타고 난 재주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며 남들이 가진 재주를 부러워만 하며 그 아까운 시간을 모두 보냈다. 늦게나마 이렇게 글이라고 몇자 끼적거리는 것도 다 뒤늦은 깨우침의 결과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쌓을 실력이 얼마나 될 지 모르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만 믿고 열심히 해 보려고 작정하였다. 지금도 부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것 저것 집적거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한 두 가지라도 손을 대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남이 가진 재주를 부러워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 먹은 대로 부러운 생각마저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되지도 않을 일에 욕심만 낸다면 이거야말로 보기만 흉할 게 틀림없으리라는 자각에 따른 결정이다. 환갑을 눈 앞에 둔 지금도 이런 저런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더 나이만 먹어간다면 이건 남의 눈에 노추(老醜)로 보일 수 밖에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아직 모든 걸 포기하기에는 이른 나이인 듯 싶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한다면 잘 할 수 있을 일을 찾아 그 동안 갖추지 못한 능력을 쌓아가는 게 그나마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가 생각난다. 당대에 작곡자이자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던 살리에리는 어느날 우연히 어린 모짤트를 만나게 된다. 그는 노는 짓거리나 말씨로 볼 때 유치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모짤트에게서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천사가 써 내려간 듯 한번도 수정하지 않은 악보를 들고 귀신에 홀린 듯 감탄하면서 하늘을 원망한다. 아름다운 곡을 쓸 능력이 없으면 들을 귀를 주지 말던지, 그것을 들을 귀를 줬다면 곡을 만들 능력도 부여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드디어 모짤트에게 장례미사곡 작곡을 의뢰하고 이 곡이 완성될 즈음 모짤트를 독살한 다음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는 스토리를 영화로 만든 내용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이야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어느 사람이라도 품어볼 수 있는 생각일 듯하다. 남이 가진 능력만을 눈 여겨보고 그 뒤에 숨은 기나 긴 세월 동안의 노력과 정열과 희생을 간과한 나 같은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다. 무슨 일이든 한 곳에 집착하지 못하는 게 내 성격이어서 부러운 일이 있으면 부러워 하다가 곧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나는 살리에리 같이 무서운 결심을 할 위인도 되지 못한다. 이런 성격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남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한 데에는 그냥 편하게 ‘소질이 없어서…’라고 단념하고 머무적거리며 시간을 보낸 결과이다. 결코 타고 난 바탕을 탓할 일이 아니다.
( 2002.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