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땅콩(17)-- 대학졸업식 유감

by 한병근 posted Feb 1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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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식 유감

 
 
   어느덧 아이들 셋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였다. 세 놈 모두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학교에 남아 있어 비록 한 놈도 제 밥벌이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만 믿고 아직까지 뒷바라지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요즈음 학위수여식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는 걸 보니 졸업 시즌에 이른 모양이다.
 
   졸업하면 아직도 생각 나는 게 우리들 학교를 마칠 때의 풍경이다. 대학 문을 나서는 건 우리 때에는 대개 학업을 마친다는 후련함과 섭섭함이 어울려 하나의 커다란 행사였다. 졸업은 사회에 첫 발을 디디는 시작이기도하여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흥분도 있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그 날 학교에 모여 말과 선물로 축하했고 식이 끝나면 으레 잔치 날처럼 식사도 함께하곤 했다. 유행처럼 학사모를 어머니에게 씌워드리고 같이 사진도 찍고, 집안에 소개하지 못했던 애인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개할 기회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은 온 집안의 큰 경사였다.
 
   시골 집에 사시던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여 졸업식에 못 오셔서 내게는 그런 사진도 한 장 찍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서인지 식구들이 모두 모여 함박 웃음으로 사진 찍던 친구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였다. 이런 내 기억 속의 아쉬움 때문에 아이들 대학 졸업식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참석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첫째 놈 졸업이 가까워 오자 졸업식이 언제냐고 채근하였다. 그런데 그 놈에게서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당시 내게는 천청벽력과 같은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문제아가 아니면 입에 담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말을 머뭇거리지도 않고 당당하게 하는 걸 보고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놈 얘기는 요즈음 누가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느냐는 거였다. 학사복 입고 언제 날 잡아 친구들하고 사진이나 찍으면 됐으니 졸업식은 잊어달라는 거였다. 아무런 말썽도 없이 착실하게 학교 생활을 해 온 그 놈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게 되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 더 얘기를 건네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조금 더 했다가는 세대 차이 까지 들고 나올 형편이어서 내 쪽에서 그만두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뒤 친구들과 아이들 대학 졸업 얘기가 나와서 물어보면 어느 집이나 대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그 놈의 생각이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한 구석에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 년 뒤 둘째 놈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놈 역시 졸업식에는 참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졸업식 날 사진은 찍겠다고 하여 점심을 같이 먹고 학교까지 갔었지만, 사진 몇 장 겨우 찍고는 서둘러 친구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기왕 졸업식에 갔으니 식장에 잠시 참석하고 사진을 찍는 게 마땅한 일이었을 터이지만, 이것 저것 얘기하다 보면 그 알량한 사진도 한 장 못 찍을까 하여 한마디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졸업식은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식장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막내 놈도 졸업식 같은 건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나도 더 얘기하기에 지쳐서 아예 하자는 대로 맡겨 두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부모님도 시간이 되면 오시라는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수석 졸업으로 총장상을 받게 되어 졸업식에 꼭 참석하라는 연락을 학교에서 받았다는 거였다. 졸업생이 졸업식에 참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학교에서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하는 건 또 무슨 일인지 도무지 내게는 해괴한 일들 뿐이었다.
 
   어떻든 세 놈을 대학에 보냈으나 처음으로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장에 당도한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예 학부를 졸업하는 졸업생 앉을 자리가 없었다. 졸업생 자리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거나 박사학위를 받는 이들을 위한 자리 뿐이고 단과대학 수석 졸업생을 위한 자리를 제외한 다른 학사학위 수여자는 앉을 자리가 아예 없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 졸업식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큰 놈, 둘째 놈 학교 졸업식장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 어쩌다가 졸업생 앉을 자리가 없는 졸업식을 하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눈 앞에 버젓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져있었다.
 
   그 뒤 그 학교의 행정대학원장으로 있던 친구를 만나 이 얘기를 하며 나는 또 한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오지않는 텅 빈 졸업생 자리를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아야 하느냐는 거였다. 졸업생 자리가 비어있는 게 너무 을씨년스럽고  눈에 거슬려 없앤 지 오래됐다는 거였다. 그런 풍속을 안타까워 하거나 자괴감을 갖는 교수도 없다는 거였다. 대학가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 지 이미 오래고 아직까지 그런 걸 모르고 지낸 내가 오히려 한심하다는 눈치였다.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어도 자리가 없어 원천적으로 참석할 수 없게 만드는 학교의 처사를 비판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이렇게 거침이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까짓 졸업식에 참석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학사학위가 취소되느냐고 따져 물어오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모른다. 졸업생 앉을 자리가 없는 졸업식장, 졸업식장에 참석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졸업생, 식장에 참석해 달라고 졸업생에게 연락하는 학교,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졸업생의 부모,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형식뿐인 일을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는 졸업식이 과연 단순한 형식적인 행사일까? 대학 졸업식의 의미가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걸까? 그렇다면 나는 과감하게 제안하고자 한다. 졸업식을 없애버리는 거다. 졸업생이 없는 졸업식을 누구를 위해서 한다는 말이냐? 학사학위의 가치가 떨어져서 석,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만을 위한 행사로 바뀌는 게 바람직하다면 대학은 졸업식을 없애고 대학원 졸업식만 남겨놓을 일이다. 졸업생 자리가 없는 졸업식은 학교 스스로가 포기한 의미 없는 겉치레 행사일 따름이다. 그런 졸업식을 왜 하느냐는 말이다. 세태가 그러니 어찌하겠냐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화보와 기사를 꼭 읽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올 대학 졸업생 가운데 유일하게 졸업식장에 참석한 이 자랑스러운 얼굴’. 이런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지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 나 혼자만의 쓸데없는 생각일까?
 
                                                                                         ( 2002.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