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移徙)를 사랑하자

by 노준용 posted May 0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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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설매재에서 나의 이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친구들이 많아  공개 설명을
여기에 하고 그 제목을 아주 거창하게  붙여 보았읍니다.
 
 
제목: 이사를 사랑하자
 
 
난 최근 6년동안 이사를 네 번이나 했다.

대치동에서 고양시 화정으로 이사한 것을 계기로 우 무일이 좋아서 환영한다고
 
따로 소주 한 잔 했었는데 그 뒤 동작구 사당동으로 옮겨  진 영애네와 한 지븡 아래
 
살다 신랑으로부터 저녁 한 번 거하게 얻어먹고는 볼 일 다 봤다고 얼마 안 있어

영등포구 대림동으로 뜨고, 그러다 신 해순네가 옆 동네로 이사를 오니 이번엔 환영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걸 생략하고 지난달 말 얼른 안양시 평촌으로 날랐다.
 
새 동네에서도 환영해 줄 친구가 있다.
 
 
도대체 무슨 역마살이 끼었다고 그리 자주 이사를 다니느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생겨 이번 이사 후로는 이사가 무엇인지 설명을 안 하고 넘어갈 방법이 없게 되었다.
 
 
옛날엔 이사라고 하면 이삿짐 싸고, 옮기고, 풀고, 정리하고, 그리고 익숙하게 되는 일을
 
해야 하고 여러군데 행정관서에 신고하는 일들이 있고 그리고 새 환경에 적응하는 일들로

번잡이 많았고 그걸 거의 식구들이 감당했었다. 그래서 이사 하는 날 품이 모자라 여럿이
 
와서 도와 주기도 하고 땀 뻘뻘 흘리곤, 그리곤 중국집 짜장면 시켜 먹고 또 일하고 참 힘든

일들을 했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요즘의 이사는 이삿짐쎈터에서 전문적으로 해 준다. 이사갈 곳을 정하기만
 
하면 할 일이야 이삿짐쎈터와  전화국에 한 통화씩 하는 일 그리고 동사무소 가서 신고하는

일이 몽땅이다. 개인적으로 회사, 학교, 동창회에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줄 데가 있는 것을
 
귀찮게만 여기지 않으면 이사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재산이 전국 각지에 무수히

널려 있어도 동사무소에 신고한 일주일 뒤면 재산세고지서가 어김없이 새 집으로 배달되어 온다.
 
시스템이 따라 주는 것이다. 나라가 발전한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연배가 있으신 분들일수록
 
이사한 일에 대해 노고를 치하해 주신다.
 
 
아파트가 주거환경의 대종을 차지하는 이 시대에 나의 이사는 지역을 선정하고  그 동네에서도
 
내가 가서 살 집의 동과 층수의 범위를 선택하고 그리고 골라서 계약하면 되는 것이다.

길일을 택해 이사하는 건 남들이 다 하는 일이니 손 있는 날을 택하면 그것 또한 괜찮은 일이다. 
 
돈이 더 들까? 써비스가 더 나빠질까?  아파트 면적과 구조만 비슷하면 이삿짐 싸고 풀고는

별 일이 아니고 더구나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옛날과 다르다.
 
 
그동안의 나의 이사는 결혼후 세 번 째 집 대치동에서 너무 오래 살아 변화를 가져 보자는
 
의미로 계획한 것이 이사의 시작이었다. 그 땐 좀 고민을 했다. 언제 결행할 것인가?
 
어떻게 이걸 착수할 것인가? 등등.  그런데 막상 큰 결심을 하고 실제 해 보니 마씨가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다.  소위 안 보던 세계, 안 가 본 곳을 가 보게 되고 그리고 새로운 곳과 친숙해
 
지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강남구 대치동과 그 주변만 알고
 
그 외의 장소는 어쩌다 스치는 곳인 줄만 알았던 마씨가 서울이 이렇게 넓은 곳인 줄을
 
직접 체험하는 첫 경험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뒤 이사한 곳에서 더 살아도 되는데 아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해 여건이 맞는 곳으로
 
이사를 한 번 더 해 보게 되었다. 해 보고 나니 이사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이 공부가 끝나니 목적이 달성되어 이젠 이골이 난 김에 재미로 이사했고 이사후
 
살다 보니 교통과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할 점이 생겨 이번에 또 이사한 것이다.
 
여건이 변화하면 이사하고 안 변하면 더 살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도 겁낼 일이 아니란 걸
 
터득하게 되었다.  경험은 역시 위대한 스승이다.
 
 
이사로 얻는 이득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변화를 갖는다는 것이다.

새 가구(이사 한 번 할 때마다 최소한 가구 하나는 개비하게 된 경험-이건 내 기쁨
 
이라기보다는 마씨의 것이지만) 새 등산로, 새로운 교회, 새 먹거리, 새 주변,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창친구이다.

 
이사의 손실은 그동안 사귄 이웃과의 거리 멀어짐, 이사비용, 그리고 전화번호의 변경이다.
 
다행이 어른을 모시지 않는 나로선 이웃과 헤어지는 심적 부담이 적기 때문에 이 점 괜찮고
 
전화번호는 휴대폰이 제 기능을 수행해 주기 때문에 집 전화의 고객은 의외로 적다는 것이

입증된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허나 이것도 차제에 평생번호로 바꿀 것인지를 생각중이다.
 
 
앞으로 2년뒤나 4년 뒤 난 또 이사를 할 계획이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이사하면 앞으로
 
몇 번 더 이사를 하게 될까?  열 번이면 30년이니까 앞으로는 최대 열 번 이내 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서 자란 서울 촌놈이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이사 다녀도 스물일곱개 구(區)
 
가운데  절반의 구(區)에서도 못 살아 볼 것이며 수백개 동(洞) 중에 스물의 한군데에서도
 
더 살아 보지 못한다. 이걸 수도권이나 나라로 따져 보면 오죽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젊었을 때 안 한 이사를 인생 후반기에서 한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나보고 자기네 동네로 이사 오라고 유치할 친구들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은가?
 
有朋이 자遠方來허니  不亦樂呼我!
 
 
우리 연배에 이사를 이렇게 자주 다니는 사람이 없어 번번히 주소록 바꾸느라 수고한
 
박영섭군과 이향숙편집장에게 참으로 고맙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선농 16 주소동정난에
 
기재할 원고거리를 간혹 제공해 주는 사람이 나라고 하는 이상한 자부심도 가져 보면서

살아 볼까 한다.
 
 
한군데서만 오랫동안 살아본 친구들이여,

 
지금 아이들 학군 걱정을 하는가?
 
당사자 예비군 걱정이 있는가? 민방위를 하는가?

 
이사가 번거롭다고 미리 걱정이 되는 것 뿐이지 않는가?
 
 
변화의 기쁨을 맛보시라.

 
한 번 이사에 수명이 반년씩 늘어날 것임을 경험으로 보증하고 싶다.

마음먹기 따라 이사를 사랑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 생각이 다른 사정에 의해 꺽이지 않기를 스스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