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by 송인식 posted Dec 07,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행복마을 회주 용타스님 정기강좌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집착은 감각기관이 대상을 접촉할 때 일어나는 마음작용이다.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성취한 것도<나는 살고 싶다>는 나에대한 집착에대한 사색과 명상을 통하여 "나 "란 實體가 없다(諸法無我)는 연기를 확연히 깨달음으로서 이제까지 나,나,나하던 집착에서 해탈(걸림없는 대자유)한 것이다.이제까지 實體視했던 <我>가 頓悟의 순간 :확! 살아져 버린 것이다/고로 부처의 깨달음을 기초한 3法印,4성제.8정도를 해득하여 올바른 價値觀을 확립함으로서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것.왜 解脫인가?  소박하게 애기하자면 행복이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행복의 指向이요 성취다.해탈의 障碍는 어리석고(痴),탐내고<貪>,성내는(瞋) 3毒에 있다.3독의 연결고리는 善순환,惡순환을 거듭한다.:있다,좋다,하고싶다,썅;의 반복이다. :있다:는 實體思考이고(이는 痴에 기인함),좋다 싫다는 價値思考(貪에 기인)로 이어지고 하고 싶다는 욕망의 좌절에서 오는 썅!은 성냄(嗔)의 不滿思考로 이여진다.

4성제로 예를 들자.苦集滅道의 :苦는 일체개고임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集)을 알아 그 원인의 소멸(滅)함으로써 방편으로서의 道(8정도,대승에선 6바라밀)를 수행,실천함이요,滅의 경지는 우리가 사물을 개념짓기 이전의 淸淨한 상태,心淸淨인바 인식이전의 텅빈 의식공간,滅盡三昧-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인바 장자는 이를 일러 太虛,無極이라 했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物自體(있는 듯이 생각되나 영원히 인식할 수 없는)로 일렀다.2000여년전 동양의 道人들이 이것을 깼쳤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현대 물리학에선 감각기관으론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입자로 설명하지 않는가.

執着에서 벗어나려면 "바로 지급 해탈하라! 바로 지금 부처돼라! 그러면 부처처럼 생각하고,말하고 행동한다.6도윤회하여 어느세월,몇겁을 기다릴것이냐,그것도 해탈한다는 보장이 있겠나?

백척간두의 切迫함,중생놀음에 끄달리지 말고 자기성찰, 大憤心이 있어야 한다.깨달음은 믿음이 아니고 確信이다.

바로지금 행복해탈하라! 바로 지금 부처되라!

    *주해:용타스님 강의을 함께한 법우들에겐 다소 생소하고 해학적인 내용이 많아 그간 자주 접해온 본인으로서 쉽게 풀어 이해에 도움이 되고져 둘러 갔으니 이해바람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