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법회를 마치고

by 이향숙 posted Sep 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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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연휴로 인해  한 주일 늦추어서 19일  법회를 가졌다.

가을답지 않게 더운 날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김없이 한해의 결실을 준비하는 차분한 날이었다.

해외여행 중이거나 개인 사정으로 참석률이 저조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오붓하게 법회가 진행됐다. 스님은 오늘영산재 또는 천도재, 49재 ( 재는 특별 불공)때 하는 범패 가락을  특별히 보너스로 6분간 하셨는데 부처님께 아주 간절하게 귀의하고 복을 청하는 내용이라고 하셨다.

 범패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불교의 전통 예술로서  樂歌舞가 합쳐진 형식인데 스님은 소리부분을 하신 것. 이는 신라 시대 하동 쌍계사에 계시던 진감국사께서 근처 섬진강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고 창안하셨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 법문 주제는 身 口 意(몸과 말과 생각)로 짓는 악업(죄)을 짓지 말자는 것.


참석자 : 김두경 박광선 박영섭 송인식 이원구 이향숙   6명


 묘적 스님 법문- 惡業을 짓지 말자


불자들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계는 5戒다. 不殺生, 不偸盜(불투도: 도둑질을 하지 말 것), 不邪淫(간음하지 말 것), 不妄語(헛된 말을 하지 않을 것), 不飮酒(술에 취하지 말 것) 등이다.

나 같은 수행자들은 250가지 계율을 지켜야한다. 근래에 와서 모든 스님들은 6개월마다 모여서 그 250가지 계율을 외운다.

불자들이나 스님들이나 각자 계율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의미에서 스님들이 계율을 외우는 행사는 계율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자들도 마찬가지다. 불살생, 즉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은 누구나 다 알지만 우리는 무의식 중에 벌레를 죽이고, 투도(도둑질)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남의 좋은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탐을 낸다. 탐내는 생각도 죄가 된다. 계는 알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업(Karma)이란 의도적 행위라는 뜻이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선업과 악업으로 나눈다. 우리는 지은 업에 따라 육도를 윤회한다. 악업이 많으면 지옥 아귀 축생(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본래 나라는 존재가 없다, 즉 無我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본래 나라는 정해진 존재가 없고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삶으로 윤회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 시대에 밤비사 王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 제자 1250명을 모두 공양에 초대했다. 그러나 한 제자가 몹시 몸이 아파서 갈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아픈 제자를 위해 불참하시고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잔치에 참석했다. 부처님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그 아픈 제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씻기셨고 그 제자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부처님이 그에게 물으셨다.

“네 기분이 어떠냐?”

“저의 시봉을 맡은 사람은 있지만 전혀 보살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실망했습니다. 전생에 제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습니까?”

“네가 젊었을 때 너는 어떠했느냐?”

“저는 천하장사였고 아주 건강했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할 때 환자를 도운 적이 있느냐? 빨래 한 번 해 준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업에 대한 인과응보 얘기다.


우리 주변에 많이 아픈 사람들은 대개 착한 사람이다. 착하지만 언젠가 지은 악업에 대한 업보라는 것이 불교의 사상, 인과응보이다. 전생에 악업을 지었거나, 현생에서도 더 젊고 건강할 때 몸을 함부로 굴리고 돌보지 않은 결과다.

자기가 현재 받고 있는 모든 일은 과거 행위에 대한 과보다. 모든 것이 남 탓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인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無我는 본래 내가 없다는 뜻인데 그 말은 내가 주체인 업에 따라 내 생이 변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습의 본래 나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그리고 부모 형제와의 만남도 모두 나의 업에 따라 정해진 인연이다.

악업이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업이다. 그러면 알고 지은 업과 모르고 지은 업은 어느 쪽이 더 클까? 얼핏 생각하기에 모르고 한 일은 잘못이 없다고 하겠지만 알고 지은 죄보다는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크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알고 지은 죄는 양심의 가책으로 다음엔 짓지 않을 수 있지만 모르고 지은 업은 다음에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의도하지 않은, 고의가 아닌 잘못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의도하지 않은 업도 악업이다.

어느 전쟁 때 버튼이 세 개 있었는데 그중 한 개만 누르면 사형이 실행되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모르고 세 개를 다 눌러 많은 사람이 사형을 당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채 무심코 세 개 다 누른 것도 분명 악업이다.

한 가지 행위가 악업이냐 아니냐, 의도한 행위냐 아니냐하는 구분은 어렵다. 똑같은 행동이 이원구 변호사에게 할 때와 박영섭씨한테 할 때는 그 영향이 다르고 따라서 그 행위가 누구한테는 善이고 다른 이한테는 惡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당하는 사람의 전생의 업에 따라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하면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행위는 선업도 되고 악업도 될 수 있다. 전생에 자비심이 많았던 사람은 키가 크고 잘생긴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전생에 자비심이 없던 사람은 키가 작고 못생기거나 수명이 짧게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업이란 사람에 따라 이처럼 기준이 다르므로 이러이러한 일은 악업이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계율을 지키면 악업을 면할 수 있다.

우리를 안심시키고 마음이 편하게 하는 것은 계율 뿐이다. 그러니 계율을 잘 지켜야한다.

불교의 교리는 어렵고 방대한데 그것을 다 배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전에도 강조했듯이 나는 교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올바른 수행을 하고 계를 잘 지키도록 도와주어서 여러 분들이 항상 ‘安心‘하고 행복하도록 도와주는 게 목표이다.

선우회 회원 불자들이 최소한 계율만 잘 지킨다면 계를 잘 지키지 않는 스님보다 백배 나아진다. 일반 불자나 스님이나 다 같은 범부 중생이며, 스님이 신도와의 차이는 계율 가짓수가 많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다면 불자는 어떤 계율을 지켜야 선업을 짓게 되나? 앞서 말한 5戒와 천수경에 등장하는 10惡을 피하면 된다. 十惡懺悔(10가지 악업을 지은 것에 대한 참회) 부분에서 그 10악을 짓지 않는 게 계율이다. 10악은 살생, 투도, 사음, 망어(헛된 말), 綺語(기어 : 교묘한 말), 兩舌(이간질 시키는 말), 惡口(험담. 욕), 貪愛(지나친 욕심), 瞋恚(진에: 성내는 것), 痴暗(어리석은 것)의 10가지 죄를 말한다.

이 중 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죄, 망어 기어 양설 악구의 네 가지는 입으로 짓는 죄다, 탐애 진에 치암은 생각으로 짓는 죄. 여기서 보듯 입으로 짓는 죄가 가장 많다.

나쁜 생각이 악업이라는 것은 그 나쁜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간절해지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본다.

교리를 다 안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계율을 잘 지키면 선업이 쌓이고 부처님의 복을 받는다.

경전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와, 잠자기 전에 십악 참회를 꼭 암송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싫으면 하다못해 사홍서원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하기 바란다. 매일 꾸준히 실천하면 비록 몸은 아플지라도 마음은 항상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바로 이 행복을 얻자는 게 우리가 수행하고 기도하고 여기 모이는 이유이다. 오늘부터라도 꼭 실천하세요. 그리고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