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대공원

by 이향숙 posted Nov 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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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수인아. 내 글은 자반 생선이고 네 글은 활어라고 말했거늘, 나더러 쓰라고? 할 수 없이 이번엔 쓴다만 앞으로는 곤란. 네 글이 훨 나은데 네 부군만 겸손해하시는구나.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앞으로는 너와 행선이 가자는 대로만 가기로 했다. 왜냐고? 니네 둘의 탁월한 선택에 감탄, 또 감탄해서 이제부터 쭈~~~욱 니네 둘 말이면 무조건 ok 할거거든.

  전날 일기예보에서 간간히 비가 내린다고 했고, 박미자 등 몇 친구는 불참하고, 원터골에서 오르는 숙자와 인자는 점심 모임이 있어서 일찍 간다고 사전 통보를 받은 터. 결국 수인, 행선, 나, 셋은 교통이 편한 서울대공원 쪽에서 청계산에 가기로 했다, 행선이 왈 “비도 온다니 옥녀봉은 관두고 대공원 산림욕장으로 가자.”

거기에 수인이 한 마디 보탰다. “산림욕장보다는 그냥 대공원 길을 산책하며 걷자.”

그리고 공원 입구로 가면서 행선이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왜?” “내가 옥녀봉 아닌 이리로 오자고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말하길 “그럼 현대미술관에서 점심 먹자. 이 동넨 마땅한 곳이 없으니 기왕이면 우아하게.”

  참, 얼마 만에 들어가 본 대공원인지, 그저 동식물원이 있는 애들 놀이터로 생각하고 무관심속에 지냈는데 많이 진화해있었다. 지역별 주거 모형들이 있고, 동물들도 늘어난 듯했다. 입구 쪽 아프리카 土人像을 지나 좀 가면서부터 시야의 풍경이 확 달라진다.

“어머. 아직 여긴 단풍이 곱네.”

이건 조족지혈. 시작에 불과하다. 우측 숲속의 산림욕장엔 칙칙한 푸른빛이거나 벗은 나무 가지인데 비해, 포장도로 길 우측에는 샛노란 빛과 빨간 빛의 향연이 우릴 연신 맞아준다. 산림욕장을 택하지 않은 수인의 선견지명이 돋보인 순간이다.

지금은 11월 중순, 며칠 전에도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아직 단풍이 한창이라니 놀랍다.

불과 5분여 지나서 수인과 행선인 사진 찍기에 몰입한다. 20여분 지났을 때부터는 양 옆 도로변이 선홍색의 단풍나무 일색이고, 찍어도 찍어도 또 찍을 곳이 이어지는 길고 기~~~인 단풍 터널. 길이가 얼마쯤일까. 우리 동기회 등산 때 7월엔 여기 산림욕장으로 여러 번 갔는데 그때 일주하면 6km라고 했던가? 그럼 우리가 걸은 길은 5km 쯤 되려나.

때마침 햇살이 내비치니 새빨간 나뭇잎의 줄기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환상적인 빛의 잔치다. 수십 년간 자란 단풍나무들이 온통 숲을 붉게 칠해놓고, 전체가 하늘마저 가린 수채화다.

지금껏 보아온 단풍은 내장산이 불타는 단풍인데, 그에 버금가는 절경이라고 우리 셋은 입을 모았다. 그럼, 전혀 손색 없구 말구.

사진 찍느라고 두 시간 걸렸는데 어, 얼굴에 빗방울? 그때부터는 후다닥 속보로 걷는다. 사진 찍느라고 산책을 제대로 못했는데 속보로 운동부족을 충분히 보상했다. 조금 전까지는 해가 활짝 비쳤는데 하늘은 시커멓다. 서둘러 미술관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초만원, 빈자리가 없다. 서서 좀 기다려 겨우 자릴 잡았다.

행선이 마구마구 주문한다. 얼큰한 해물 파스타, 담백한 해물 크림파스타, 고구마 피자. 야채 스프와 커피. 이 집은 정숙자가 알려준 집인데 오늘 우리만 와서 미안.

음식을 받고 창밖을 보니 비가 제법 쏟아진다.

“오래 내릴 비가 아닌 듯하니 수다 떨면서 비 그치기 기다리면 돼.”

먹기와 동시 수다 타임 시작.

오늘 서울 대공원의 재발견이라는 얘기부터 행선과 수인의 탁월한 선택에 찬사를 보내고, 앞으로는 봄 벚꽃 필 때, 가을 단풍 물들 때는 매화당 전원이 여기로 꼭 와보는 게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의견을 모으고, 오늘 함께 못한 친구들에게 아쉬운 마음을 느꼈다.

게다가 좋은 전망을 보며 푸짐하고 좋은 점심까지 먹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식사를 마치고 3시 좀 나오니 하늘은 개었다. 겨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젠 겨울의 문턱. 영화 만추에서 주인공은 바바리 깃을 세우고 쓸쓸하게 만추를 보내지만 우린 기쁨 속에서 환송했다.

2012년 가을아, 단풍아  굿바이. 내년에 다시 보자.

그래도 기분은 최상으로 업 된다.

  매화당 친구들아, 다음엔 꼭 이 즐거움을 공유하자.